산속 부부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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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수호는 젊은 시절부터 오랜 기간 병을 앓았다. 이제 사십대 중반이지만 병은 이미 그의 온몸을 점령했다. 와이프 나영은 지극정성으로 그를 간호했고 입원한지 3년 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퇴원을 했다. 봄기운이 싹틀 무렵 병원을 나온 부부는 완전히 병을 치유하고 보다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 아무도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었지만 부부가 합심해 집을 짓고 텃밭을 키우고 약초를 캐며 점차 안정을 찾아갔다.
“어때, 여보? 이만하면 살만 하지?”
나영은 수시로 수호의 안색을 살피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다. 수호는 그런 나영이 안타까워 가끔 일을 도왔는데 힘에 부쳤는지 그런 날 밤엔 어김없이 악몽을 꾸었다. 악몽에서는 늘 같은 악귀가 등장했다. 하필 와이프 나영과 똑같은 모습으로 둔갑한 악귀였다. 꿈속에서 악귀에게 쫓기던 수호는 온몸에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곤 했다.
“아무래도 당신, 기가 약해서 그런가 보다.”
나영은 남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절벽도 서슴지 않고 올라가 약초를 캐왔다. 수호로서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지만 그녀의 마음과는 달리 헛것이 보이는 수호의 증세는 날로 심해졌다. 이제는 꿈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나영을 닮은 악귀가 나타났다. 한 번은 악귀에게 속아 절벽에서 떨어질 뻔한 일까지 벌어졌다. 나영은 이대로 두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어 한 가지 꾀를 냈다. 그들만의 비밀 언어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비밀 암호를 만들자는 거지? 악귀는 절대 모르는!”
“쉿! 크게 얘기하지 마. 혹시라도 그 못된 것이 알아챌지도 모르니까.”
나영은 남편 수호의 손목을 잡고 계곡으로 갔다. 그리고 흐르는 계곡물에 질문과 답을 적었다.
“혹시라도 악귀라고 의심되면 이렇게 물어 봐.”
나영은 흐르는 물에 너의 이름은 이라고 적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답할 건데?”
수호의 질문에 나영은 흐르는 물 위에 홍칠숙 이라는 글자를 썼다.
“엥? 그게 누구야?”
나영은 부끄러운 듯 발갛게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실은 이게 내 본명이야. 개명했거든, 이름이 너무 촌스러워서.”
“뭐라고? 우하하하!”
수호는 오랜만에 박장대소를 했다. 나영은 그 모습을 보며 수호가 얼른 건강을 되찾아 헛것이 안 보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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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비밀 암호를 정한 후 수호 앞에 좀처럼 악귀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났더라도 수호가 너의 이름은, 하고 물으면 악귀는 스르륵 꼬리를 감추고 사라졌다.
악귀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부부에겐 평화가 찾아왔다. 수호의 건강도 날로 좋아져서 낮이면 나영과 함께 텃밭을 가꾸고 밤이면 낮에 캐온 약초를 함께 다듬었다. 산속살이의 가장 큰 수입원이 약초였기에 수호는 정성스럽게 그것을 다루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산속에 서리가 내리고 김장철이 다가왔다. 부부가 열심히 텃밭을 가꾼 덕에 배추와 무가 한가득이었다. 그들은 전날 절여둔 재료를 방으로 가져와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산속에서 처음 하는 김장이라 괜스레 설레었다.
“하하, 병원에 있을 땐 이렇게 당신하고 오손도손 지낼 날이 올 줄 생각도 못 했는데.”
“그러게 말이야. 당신 더 건강해지면 우리 예전처럼 여행도 가고 아이도 낳고 그러자.”
“그럼, 그래야지.”
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눈물을 닦아내며 가만히 나영의 손을 잡았다.
“나영아, 정말 고마워. 나 이제 거의 나았으니까 내년 봄에 약초 캐러 갈 때는 같이 다니자. 빨리 돈 벌어서 예전처럼 다시 중식당도 차리고.”
“어머, 정말?”
나영은 뛸 듯이 기뻐했다. 수호는 제법 맛집으로 소문난 중국요리점을 운영했었는데 병으로 쓰러진 후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는 상상을 하자 나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아참, 간식으로 먹을 고구마 얹혀 놨는데 깜빡했네.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가져올 테니까.”
방을 나서는 나영을 수호는 흐뭇한 미소로 지켜보았다.
“착한 사람이야. 아름다운 사람이고.”
잠시 후 나영이 고구마 소쿠리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헌데 그녀의 모습이 달라졌다.
‘어, 이상하네? 아까는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왜 갑자기 머리를 풀었지?’
항상 단정히 머리를 묶던 나영인데 웬일인지 산발로 풀어헤친 모습이었다.
‘설마, 또 악귀?’
수호는 나영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다 넌지시 물었다.
“당신, 머리는 왜 풀었어?”
“어, 머리? 그러게. 끈이 어디 빠졌나?”
나영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수호는 덜컥 의심이 생겼다.
“네 이름은?”
‘아이, 왜 그래? 여보. 나 맞아. 식기 전에 어서 고구마나 먹어.”
하지만 수호의 눈에는 나영의 뒤로 어른거리는 검은 연기 같은 게 보였다.
‘저건 악귀가 나타날 때마다 있었던 검은 연기인데?’
수호의 눈이 두려움으로 번뜩였다.
“얼른 말해, 너의 이름은?”
수호의 손에는 어느새 무를 자르던 중식도가 들려 있었다. 수호가 중식당을 할 때 쓰던 것이다.
“너의 이름은?”
“에이그, 당신도 참. 와이프도 못 알아보고. 알겠어. 내 이름은 홍, 홍...”
하지만 나영은 자신의 옛 이름을 대지 못했다.
“어, 왜 이러지?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중식도를 든 수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향해 그것을 휘두를 기세였다.
“내 이름은…홍...”
나영은 입이 얼어붙은 사람처럼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소리를 내려 해도 입만 달싹거릴 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너의 이름은?”
수호의 눈에 핏발이 섰다. 중식도를 번쩍 들어 올린 그는 언제라도 그것을 내리칠 태세였다.
“여보, 나 맞아. 그러니까 내 이름은 홍…”
하지만 그녀는 끝내 이름을 대지 못했고 수호의 손은 번쩍 허공을 갈랐다.
“이런 간악한 악귀를 봤나!”
“허억!”
- 음향효과
앞에 앉은 그녀는 그대로 즉사했다. 그녀의 목에서 나온 피는 배추와 무, 그리고 수호의 얼굴에 튀었다.
“어, 이거 뭐야? 귀신이 피를 흘릴 리가 없는데? 설마...진짜 나영이?”
수호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벌컥 방문이 열렸다.
“여보, 왜 이렇게 시끄러워? 어머, 이게 뭐야? 이게 바로...나랑 똑같이 생긴...그 악귀야?”
나영의 모습을 본 수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이다. 그런데 무슨 악귀가 피를 흘리지?”
“이건 분명 그 못된 악귀가 당신을 괴롭히려고 꾸민 짓일 거야. 근데 이걸 어쩌지? 땅에 묻거나 산에 버리면 다시 나타날 지도 모르는데. 완전히 없애버리게 깨끗이 태울까?”
“어? 그래! 그러자.”
수호는 서둘러 마당에 불을 지폈고 안에서 끌고 나온 사체를 태워버렸다. 산속에는 온통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이상하네? 귀신이 불에 타는 것도 이상하고 어쩐지 냄새도 살 타는 냄새 같잖아?’
하지만 엄연히 수호의 앞에는 나영이 서 있었다.
“왜 여보, 뭐가 이상해?”
“아니, 살 타는 냄새가 나서. 귀신은 살이 없잖아?”
“호호, 내가 이유를 알려줄까?”
나영이 오묘한 웃음을 흘리며 다가와 수호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 타고 있는 게 사람이니까 살 타는 냄새가 나지. 어때? 널 위해 헌신한 사람을 태우는 기분이.”
“뭐, 뭐라고?”
수호는 깜짝 놀라 나영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영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본모습으로 돌아온 악귀는 깔깔대며 웃었다.
“미련한 놈 같으니, 내가 너희 둘의 비밀을 모를 줄 알았냐? 네 와이프가 계곡물에 새긴 글자를 내가 수귀신한테 알아냈지. 네 마누라가 이름을 말하려고 할 때마다 내가 소리를 빼앗아 얼려버렸다고. 크하하하!”
악귀는 나영이 물에 썼던 글자가 박힌 물방울을 허공에 흩뿌려 수호에게 보여주었다.
“흐흐흐, 어떠냐, 괴롭냐? 죽을 것 같으냐?”
“으아아악!”
수호는 머리를 감싸 안고 미친 듯이 절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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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후, 수호는 다시 도시로 내려왔다. 하지만 그는 예전의 수호가 아니었다. 손에 중식도를 들고 휘두르는 미치광이일 뿐이었다.
‘나영아, 어서 여기로 피해! 거기 악귀가 있을지도 몰라. 어서!”
수호는 더 이상 곁에 없는 와이프를 구하기 위해 팔이 멍들도록 중식도를 휘둘렀다. 하지만 사람들 눈에 그는 그저 난폭한 정신병자로 보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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