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실험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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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갓 들어간 회사에서 채 1년을 버티지 못한 성진은 벌써 백수 생활이 6개월째다. 알바라도 찾아 볼 생각으로 인터넷을 뒤지던 그에게 매력적인 광고가 들어왔다.
- 실험 아르바이트 모집. 약간 명, 시급 30만원.
시급 만원도 찾기 힘든 세상에 30만원이라니, 그는 그 길로 곧장 실험 알바를 신청했다. 실험을 주관하는 것은 A 제약회사였는데 새로 개발하는 감기약 임상실험이었다. 최종적으로 임상실험에 합격한 사람은 총 5명, 성진도 운 좋게 거기에 끼어 있었다.
“이번 실험은 위험도가 크지 않습니다. 다른 신약 임상에 비해 매우 간단하고 리스크도 적습니다. 고로 지금 모인 다섯 분은 거의 공짜로 30만원을 받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머리가 완벽하게 빠져 반짝거리는 민머리 남자, 김 팀장이 실험의 개요를 설명했다.
“지금 지급해드리는 감기약을 드시고 내일 오셔서 채혈하고 돈 받아 가시면 아르바이트 종료입니다. 참 쉽죠?”
성진은 김 팀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 것도 없잖아. 이 정도면 괜찮은데.’
김 팀장의 설명대로 실험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성진은 회사에서 제공된 감기약을 먹었고 다음 날 채혈을 마쳤다. 별 어려움도 없이 그의 손에는 30만원이 쥐어졌다.
“야, 뭐하냐? 형님 돈 생겼으니까, 술이나 한 잔 하자.”
성진은 평소에 신세 진 친구 녀석을 불러 저녁도 먹고 실컷 술도 마셨다. 간만에 느껴보는 맘 편한 시간이었다.
성진의 몸에 이상 징후가 생긴 건 그로부터 일주일 후였다. 온몸의 털이 굵고 무성해 진다 느낀 성진은 처음엔 큰 문제가 아니라 여기고 넘어갔다. 하지만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점점 털의 양이 빼곡해지고 거칠어지자 그대로 둘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그는 털을 깎으면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털을 깎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빨라져 오전, 오후 한 번씩 온몸의 털을 깎아도 자라나는 털을 감당할 수 없었고 어느새 그의 몸은 온통 털로 뒤덮여 짐승처럼 되어 버렸다.
‘아무래도 그 실험 때문인 것 같아.’
그는 제약회사에 전화를 걸어 문의했지만 담당자였던 김 팀장은 털과 감기약 실험은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며 딱 잡아뗐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을 느낀 그는 인터넷을 뒤지며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수소문했다. 그러던 중, 자신보다 먼저 감기약 임상실험에 참가했던 한 여자의 사연을 알게 되었고 곧 그녀를 만났다. 온몸이 털로 뒤덮인 여자는 칭칭 몸을 감싸고 나왔지만 얼굴에 난 털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회사에 여러 번 찾아갔지만 모두 제 탓으로 돌리더군요. 혹시 그 쪽도 실험하고 일주일 이내에 술을 먹었나요?”
“술이요?”
실험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친구에게 거나하게 술을 산 기억을 떠올리며 성진은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그렇긴 한데, 그게 문제가 되나요?”
“제가 변호사까지 대동해서 가니까 제약사에서는 술 때문에 일어난 부작용이라고 책임질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사전에 그 부작용을 알려줬어야죠!”
“그러게요. 근데 우리가 작성한 계약서에 아주 작은 글씨로 술을 먹지 말라는 내용이 적혀 있긴 했어요.”
“그럴 리가...”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시 작성한 계약서를 찾아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런 문구는 없는데. 아, 설마 이건가?”
그는 계약서 하단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글씨로 적힌 문구를 힘겹게 찾아냈다.
“이건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을 글씨인데.”
그는 돋보기를 가져와 글자를 확대해가며 읽기 시작했다.
- 술은 각종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으니, 실험 후 일주일 이내에는 가급적 금주하십시오.
‘가급적? 웃기고 있네.’
아마 그들도 부작용에 대한 확실한 자료가 없었던 듯 애매한 표현으로 적혀 있었다. 난감해진 그는 점점 몸을 점령해가는 털을 없애기 위해 제모까지 해보았지만 그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짐승처럼 변해버린 그를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고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그 또한 어느 때부턴가 사람들을 피해 다녔고 급기야 멸시에 찬 눈을 피해 산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어쩌지도 못할 바에야 맘이라도 편하게 살자는 생각에서였지만 산속의 생활도 만만치는 않았다. 쫓기듯 도망쳐온 산중 생활은 불편하기 그지없었고 혼자 있는 삶이라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견디다보면 지낼만하겠지 생각하며 버텨봤지만 젊고 혈기왕성한 그에게는 역시 무리였다.
‘도저히 이렇게는 안 되겠어. 이건 사는 게 아니야. 날 이렇게 만든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어.’
그는 굳은 결심을 하고 산을 내려왔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제약회사 놈들에게 톡톡히 사과를 받아내고 보상금도 청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부딪힌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어디에서도 그의 주장에 귀기울여주지 않았다. 자신의 사연을 인터넷에 올리고 기자들을 찾아가 호소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의 고통을 알아주지 않았고 점점 그의 분노는 극에 달해갔다.
‘이대로는 억울해서 못 살지.’
그는 급기야 제약회사 로비에 휘발유통을 들고 들어가 버티고 섰다.
“나 이렇게 만든 놈 나오라 그래! 안 그러면 다 불 질러 버릴 거야.”
털로 뒤덮인 짐승 형체의 그가 소리를 지르며 위협하자 로비에 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하며 흩어졌고 곧이어 김 팀장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김 팀장은 긴장된 상황에도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 성진씨.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내 사무실로 가서 얘기합시다.”
그는 부드러운 말투로 달래듯 성진을 이끌어 자신의 사무실로 데려갔다.
“하하, 성진씨 같은 실험참가자들 덕분에 저는 부장으로 진급을 했습니다.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공식 사과하고 보상금 지급하세요. 난 평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 처지니까.”
성진의 말에 김 부장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글쎄요, 그게 쉽지가 않아요. 일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저희 회사 과실은 전혀 없으니까요. 그것보다는, 새로운 프로젝트가 있는데 거기에 참가해보는 건 어때요?”
김 부장은 민머리를 반짝이며 반지르르한 혀를 놀려댔다.
“실은, 저희 회사가 제모제를 개발 중인데, 제가 예전부터 성진씨를 염두에 두고 있었거든요. 어때요? 이번에도 실험에 참가하는 게? 파격적으로 300만원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실험 기간은 한 달이 좀 넘을 것 같지만, 잘만 되면 성진씨의 털도 해결되고 돈도 벌고, 얼마나 좋습니까?”
“이 자식이, 끝까지!”
또다시 자신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려는 김 부장의 뻔뻔한 태도에 성진은 화가 치밀었고 곧 이성을 잃어 미쳐 날뛰었다.
“다 죽어 버려!”
성진은 김 부장에게 달려들어 그를 때려눕히고는 그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 불길은 순식간에 퍼져 김 부장과 성진 자신은 물론 회사 건물의 상당 부분을 태웠고 며칠 후 회사 홍보실은 기자들을 모아 보도 자료를 냈다.
- 정신병으로 의심되는 한 남자가 불특정 다수를 노린 묻지마 범죄를 행하는 과정에서 이를 막으려던 고위급 직원 한 명이 자신을 희생해 큰 피해를 막았습니다.
홍보실의 자료대로 기자들은 기사를 쏟아냈고 A제약회사의 임상실험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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