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작가 2021. 3. 12.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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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조명에 담배 연기가 부유하는 지하실, 남자가 침대에 묶여 있고 팔과 목에 타투를 한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대답대신 담배 연기를 그의 얼굴에 후우, 하고 불어댔다.

뭐가 그렇게 급해? 이제 쇼 타임 시작인데, 호호호.

 

***

 

하루 전, 조명우는 새로 사귄 어린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이었다.

오빠, 나 가 보고 싶은 데가 있는데요.

그래? 우리 지수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가지. 어디야? 가고 싶은 데가.

남자는 자신의 스포츠카 옆자리에 탄 20대의 앳된 여자를 돌아보며 호기롭게 말했다. 마침 자동차는 신호대기에 걸린 상태였다.

바다요

바다? 동남아? 하와이? 어디?

삼척 바다요.

여자의 말에 명우는 갑자기 껄껄 웃어댔다.

우리 지수는 다른 여자들하고 다르구나.

다른 여자들은 어떤데요?

지수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뭐랄까, 약간의 허영, 허세, 그런 거 있잖아. 해외쯤은 나가야 된다, 뭐 그런 거.

오빠, 여자 많이 사귀어 봤나보네요.

에이, 그렇진 않고. 그냥 조금, 아주 조금. 후후

명우는 하트모양의 큼지막한 타투가 새겨진 굵은 팔로 귀엽다는 듯 지수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액셀을 밟았다. 스포츠카는 굉음을 내며 삼척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갔다. 평일이라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차 안의 두 사람은 여느 연인처럼 행복해보였다. 막 시작된 연인답게 중간 중간 틈날 때마다 스킨십을 하며 세 시간여를 달려 삼척 바다에 도착했다.

, 이제 삼척에 도착했습니다. 어디로 모실까요?

명우는 젠틀한 남자배우를 흉내 내며 그녀에게 물었다.

바다 보며 술 한 잔 마실까요, 우리? 여기 맛집으로 유명한 횟집 있던데.

오호, 우리 지수가 낭만을 아는구나. 좋지, 좋아.

명우는 지수가 안내한 대로 바닷가 근처의 횟집에 차를 댔다.

맛집인데 사람이 별로 없네. 평일 낮이라 그런가?

전 한적해서 더 좋은데요. , 우리 건배해요. 원 샷.

한상 가득 회와 음식이 차려지자 지수는 흡족한 듯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그에게도 술을 권했다. 먼 지방에 와서 술을 마신다는 건 하룻밤을 자고 가겠다는 암묵적인 합의라 생각하며 명우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지난 보름 동안 그렇게 비싸게 굴더니, 드디어 오늘밤 허락 하겠다? 나야 고맙지.

그는 흥취에 젖어 그녀가 권하는 대로 술을 들이켰다.

캬아, 술맛 좋다. 오늘 따라 왜 이렇게 소주가 다냐?

어머, 저도요.

생각보다 지수의 주량은 셌다. 만나는 동안 몇 번 술을 마시기는 했지만 그녀는 매번 술 한 잔을 받아놓고는 빼기 일쑤였다. 그러던 그녀가 완전히 날을 잡은 듯, 명우와 보조를 맞춰가며 술을 마셨다. 아니,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들이부었다.

, 이러다가 내가 먼저 쓰러지겠는 걸?

명우는 앞에 놓인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으며 즐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보기보다 저 힘 세요. 오빠 취하면 제가 업고 갈게요, 호호.

에이, 설마.

명우는 풍만하게 굴곡진 지수의 몸을 눈으로 훑으며 흐뭇하게 웃었다.

그건 안 되지. 내가 널 업고 들어가야지. 후후.

하지만 말짱한 지수와는 달리 어느덧 주량을 넘긴 명우는 점점 취해갔다. 그럼에도 지수는 계속해서 명우의 술잔을 채웠다.

오빠, 이렇게 약한 모습 보일 거예요? 실망이야.

그녀의 애교에 명우는 거의 쓰러질 듯한 몸을 고쳐 잡고 연거푸 술을 마셨다.

어이쿠, 취한다.

결국 그는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었다.

이걸 어떻게 해? 사람 좀 불러줄까요?

횟집 주인 여자가 걱정스런 말투로 말을 건넸다.

괜찮아요. 지금은 운동 관두고 살을 빼서 그렇지 역도선수 출신이거든요.

지수는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 힘든 기색 없이 그를 들쳐 업었다.

어머나, 아가씨가 뭔 힘이 그렇게 세? 호리호리한 아가씨가 힘이 장사구만.

주인 여자의 놀란 눈에 아랑곳 않고 지수는 그를 들쳐 업은 채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타고 온 차가 세워진 건물 뒤편 주차장을 지나 지수는 횟집 뒤쪽으로 난 야산으로 들어섰다. 야트막한 산을 넘어가자 그녀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이 자식, 늘어지니까 더 무겁네.

그녀는 앳된 얼굴에 맞지 않게 거친 말을 내뱉으며 산 너머의 중턱에 자리한 허름한 집으로 들어갔다. 집은 쓰러져가는 기와가 얹힌, 마당이 넓은 단층 주택이었다.

영주 언니, 저 왔어요.

그녀가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자 마당에서 기다리던 30대 초반의 여자가 지수를 맞았다.

고생했어, 지수야. 약속한 돈은 지금 바로 쏴줄게. 돈 엄한테 쓰지 말고, 알겠지?

그럼요. 감사합니다, 언니.

지수는 그녀에게 명우를 인계하고 대문 밖으로 사라졌다.

흐음, 이제 쇼 타임이군.

영주는 그를 질질 끌어 지하실로 내려갔다. 거꾸로 끌려 내려가는데도 명우는 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술도 술이지만 지수가 몰래 넣은 수면제도 한몫 했다.

, 목말라.

한참을 곯아 떨어져 있던 명우는 서서히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물 먹고 싶어?

그는 난데없이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이 목소리는…”

그는 희미한 조명 아래 어른거리는 영주를 바라보았다.

, 아니 네가 왜…”

깜짝 놀란 그는 벌떡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발가벗겨진 채, 침대 위에 단단히 묶인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냐고? 이거 왜 이래. 우리 약속 했잖아? 헤어지면 우리 사랑의 맹세로 새긴 타투 긁어내기로.

내껀 내가 알아서 지울 테니까 진정하고 이것 좀 풀어줘.

영주의 번뜩이는 눈에 잔뜩 겁먹은 명우는 다급하게 말했다.

에이, 그건 아니지. 너만 그렇게 쉽게 지울 수는 없잖아. 네가 나한테 한 짓이 있는데. 벌써 잊었어?

영주는 자신의 몸에 선명히 남은 흉측한 상처 자국을 보란 듯이 명우의 눈앞에 보이고는 날카로운 칼을 들고 명우에게 다가왔다.

영주야, 제발 진정해. 그땐 다 널 위해 그런 거였다고, 그래야 너도 미련이 없을 테니까...

다른 여자 생겨서 강제로 날 떼 내겠다고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게 날 위한 거였다고? 뻔뻔한 자식.

그녀 가슴 안쪽과 어깨의 뭉그러진 살처럼 그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그건 내가 다 보상해 줄게. 나 돈 많은 건 영주 너도 알잖아.

후후, 보상이라. 이걸 어떻게 보상할 수 있지? 이 방법 말고.

영주는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그의 팔뚝에 있는 문신 가까이 칼을 가져갔다.

이게 나의 보상 방식이야, 이제부터 즐기라고.

, 그만, 안 돼. 아아악.

명우의 처절한 비명이 산장을 울렸지만 인적 없는 산골 집의 지하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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