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작가 2021. 4. 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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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게 아닌데…”

새로 입사한 회사의 환영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스도 끊기고, 택시 타야겠네.

경기도 외곽에 집이 있는 그로서는 서울에서 택시를 잡는 게 영 부담스러웠다.

어휴, 택시비가 5만원은 나오겠어, 젠장.

그래도 집에는 들어가야 하니 어쩔 수는 없었다. 평소 그는 택시 앱을 이용하곤 했지만 오늘은 운 좋게도 바로 택시가 왔다.

어서 오세요. 멋진 밤입니다.

콧수염 때문에 조금은 불량스러워 보이는 기사는 인상과 달리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삼흥 가주세요.

삼흥, 이요?

목적지를 얘기하자 순간 기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삼흥, 좋지요. 13번 국도로 모시겠습니다.

국도 말고 그냥 외곽 순환도로 타고 가면 안 될까요?

손님, 오늘 같은 날 외곽타면 많이 막혀서 요금이 만원은 더 나올 텐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요? 그럼 알아서 가주세요.

요즘 13번 국도에서 사고가 잦다는 뉴스를 본 터라 찜찜했지만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에다 택시비까지 더 나온다고 하자 그는 기사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기사의 말대로 택시는 금세 서울을 빠져나가 시원하게 뚫린 국도를 달렸고 제법 안정적인 운전 솜씨 덕에 얼큰하게 술이 된 그는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손님!

얼마나 지났을까, 깊이 곯아떨어졌던 그를 기사가 흔들어 깨웠다.

다 왔나요?

그는 잠이 덜 깬 얼굴로 기사에게 물었다.

그게 아니라 죄송한데손님 한 분 더 태우고 가겠습니다.

합승을 하겠다고?

택시기사의 어이없는 요구에 그는 짜증이 밀려왔다.

밤중에 여자분 혼자 외진 국도에 서 있어서요. 저 사람 안 태우면 위험할 수도 있어요.

갓길에 정차한 택시의 창밖으로 긴 머리에 단정한 매무새의 여자가 서 있었다.

그러세요.

그는 뒷자리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기며 계속 여자를 힐끗거렸다.

손님, 뒷자리 손님이 타셔도 된답니다!

기사의 말에 여자는 재빨리 뒷좌석에 올라탔다.

감사합니다. 혼자 택시 타기 무서웠는데, 다른 손님이 계시니 안심 되네요.

여자는 그에게만 들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말했다.

, …”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자리에 앉은 여자를 훑어보았다.

이 밤에 여자 혼자, 왜 이런 데 있었던 거지?

이상하시죠? 이 시간에 이런데서 여자 혼자 택시 잡는 게?

? ......

갑작스런 여자의 질문에 그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스러웠다.

제가 오랫동안 사귀었던 남자가 있는데요. 지금 그 남자하고 헤어지고 오는 길이예요.

여자는 그의 귀 옆으로 바싹 다가서며 비밀을 말하듯 속삭였다.

처음 본 사람한테 별 얘길 다 하네.

주책이죠? 남자친구도 항상 그걸 지적했어요. 아무한테나 너풀거린다고.

계속 여자가 속마음을 읽는 것처럼 말하며 다가서자 술기운마저 확 깨었다.

오늘도 남자친구랑 드라이브를 다녀오는 길이었는데요, 제가 다른 남자를 쳐다봤다고 몰아세우지 뭐예요.

여자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하소연하듯 말했다.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피곤한 와중에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나한테 털어놓겠어.

계속 얘기해도 되죠? 어쨌든 저도 오늘은 못 참겠더라고요. 매일 의심에, 지적질에, 이 남자가 의처증이 있나 싶어서 그만...

그의 꿀꺽, 하고 침 넘기는 소리가 택시 안에 울려 퍼졌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그에게 처음으로 말대꾸를 하고 말았어요. 어찌나 통쾌하던지,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어요.

그가 무심코 쳐다본 여자의 얼굴에는 행복감과 슬픔이 동시에 어려 있었다.

하지만 찰나의 통쾌함 치곤 대가가 너무 가혹하네요.

대가라니요?

어느덧 그도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 들어 저도 모르게 호기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 죄송해요. 제가 그만 너무 몰입해서...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손을 여자가 살며시 그러안았다.

괜찮아요. 덕분에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났잖아요.

찡긋, 윙크를 하며 여자는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당황스런 상황이었지만 그도 싫지는 않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렇게 그녀를 감싸 안고 있는데 택시기사가 적막을 깨고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손님들다 왔습니다!

그는 지갑을 꺼내며 라이트가 비추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주위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여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집중하느라 통 바깥을 보지 않았던 그는 뭔가 낯선 풍경에 어리둥절했다.

여기가 어디예요? 삼흥아파트 앞 맞나요?

여기 목적지 맞아요. 여자분 벌써 내려서 기다리시네, 눈치 없으시긴. 흐흐.

이미 차에서 내린 여자가 차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며 그의 손을 이끌었다.

어서요, 어서.

기사의 재촉과 그녀의 간절한 손길에 그는 엉겁결에 택시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어디예요?

우리가 갈 곳이요. 혼자 가기 외로웠는데, 다행이에요.

그녀는 그의 손을 꼭 부여잡고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푹신한 흙길이 발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새까맣게 보이지 않는 길을 그녀는 잘도 걸어갔다.

아까, 대가가 뭐였냐고 물었죠?

?

제가 남자친구에게 처음으로 말대꾸를 하고 당한 가혹한 대가 말이에요.

, . 그 얘길 하다가...

제 남자친구는, 운전할 땐 특히 예민해지는 사람이에요. 근데 그걸 깜빡해서...

그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차에서 밀어버렸어요. 시속 100킬로가 넘는 도로에서 말이죠.

네에?

맞죠? 제 말이. 한 번의 통쾌함 치곤 너무 혹독한 대가라는 게, 후후.

그는 오싹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 멈춰 섰다. 그제야 어둠이 눈에 익은 그의 시야에 봉긋한 무덤이 가득한 공동묘지가 들어왔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왜 이 여자와 이런 길을...

버티고 선 그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정리를 하려는데 여자가 그를 감싸 안으며 속삭였다.

이제 인정해요, 버티면 당신만 힘들어.

무슨 소리에요, 그게?

당신, 회식하다 알코올 과다로 심장마비 와서 죽었어. , 아까 얘기한대로 남자친구한테 살해되었고.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죽다니, 말도 안 돼!

그의 절규가 무덤가를 울리자 푸른 혼불이 두 사람의 주변을 어지러이 날아다녔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요. 어서 서둘러요! 여기서 이러다간 혼불에 갇혀버리고 만다고요!

비명을 삼키며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정신없이 어딘가로 달리던 그는 탁, 하고 후려치는 느낌에 그 자리에 쓰러졌다.

***

여기가...어디지?

새하얗고 강렬한 빛이 그의 눈에 들어 왔다. 너무 눈이 부셔 눈을 뜰 수 없었다.

이봐, 정신 차려! 젊은 사람이 왜 그런 짓을, 쯧쯧쯧.

그제야 눈을 뜬 그의 앞에 기가 찬 표정의 택시 기사 아저씨가 혀를 차고 있었다.

나 아니었으면 자네 저 세상 사람 될 뻔했어. 왜 멀쩡한 차에서 뛰어내릴라 그래?

갓길에 정차된 택시 뒷자석에서 그는 가로 누워 있었다. 머리에 통증을 느끼며 일어나 앉자 택시기사가 생수를 건네며 말했다.

다급해서 그만, 핸드폰으로 자넬 후려쳤어. 치료비는 못 줘! 자네 탓도 있으니까.

한 모금 생수를 넘기려는데 갓길 건너편 어둠속 한가운데에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아깝다. 데려갈 수 있었는데...히히히.

그의 옆에 앉아있던 긴 머리의 그녀가 그를 지켜보며 미소 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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