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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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영지, 올해 열 살입니다. 다소 촌스러운 이름을 지어준 엄마와 작은 아파트에서 단둘이 삽니다. 엄마와 외할머니 말에 의하면 아빠는 해외 출장 중입니다. 내가 다섯 살 때 출장을 갔으니까 벌써 5년이나 되었네요. 가끔 이메일 편지가 오긴 하는데 글씨체가 드러나지 않으니 아빠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게다가 나는 열 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영상통화 한 번도 않고 5년 넘게 출장 중이라니 분명 뻔한 거짓말일 테지요. 아무래도 엄마와 아빠는 이혼한 것 같습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서 엄마와 저를 버리고 외국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예요.
아무튼 저는 이혼녀 또는 싱글맘의 하나뿐인 딸입니다. 나름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예뻐서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없어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제법 성숙하지요? 호호.
오늘은 학교 소풍날입니다. 근처 공원에나 갈 줄 알았는데 웬일로 이번엔 산으로 소풍을 간다고 합니다. 물론 정상까지 가는 건 아니고 산 중턱 널따란 곳에서 선생님은 우리들을 멈춰 세웠습니다.
“모두 선생님 말 잘 따르고, 개별 행동은 절대 금물이에요.”
선생님은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걱정이 되는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쳇, 열 살이나 된 우리를 아직도 유치원생 취급 한다니까.’
우리는 그곳에 자리를 펴고 앉아 점심을 먹었습니다. 저는 엄마가 싸준 김밥을 꺼내었고 다른 애들도 수제 햄버거나 색색이 예쁘게 꾸민 주먹밥을 펼쳤습니다. 호사스럽게 층층이 다양한 요리로 채운 도시락을 싸온 아이도 있었습니다.
‘촌스럽게 나만 김밥이람.’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친구 초롱이와 사이좋게 김밥을 나누어 먹고 녀석이 가져 온 호화로운 도시락도 맛보았습니다. 삼단 찬합에 싸온 녀석의 도시락에는 내가 좋아하는 돈가스와 유부초밥, 그리고 과일까지 있었습니다.
“영지야, 우리 저기 가볼래?”
선생님은 먼 곳은 가지 말라고 했지만 그 말을 듣는 아이가 몇이나 될까요, 나는 초롱이와 함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토끼가 살 것만 같은 숲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와, 여기 봐! 영지야.”
초롱이 녀석은 산짐승이 싸놓은 똥을 보며 신기한 듯 달려들었습니다.
“너 똥 처음 보냐?”
“이거 혹시, 호랑이 똥 아닐까?”
이런 얼뜨기 같은 녀석과 친구라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호랑이는 한국에서 멸종됐거든!”
“그래도 혹시 모르지.”
녀석과 말을 하며 계속 나아가다 보니 제법 숲속 깊숙이까지 들어왔습니다.
“무섭다, 영지야. 이제 그만 돌아가자.”
산짐승의 흔적을 찾겠다며 달려 나가던 녀석은 어느새 두 눈 가득 겁을 집어먹은 채 바짝 내 꽁무니에 따라붙었습니다. 나는 녀석과 함께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오며 일행이 있는 쪽으로 향했습니다.
“길이 갈렸네. 영지야, 저쪽 맞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이쪽에서 왔잖아.”
“아니야, 분명히 저쪽으로 가야 아까 봤던 똥이 있다고.”
녀석은 여전히 똥타령을 하며 고집을 부립니다.
“아니야, 내 생각엔 이쪽이 맞아!”
“아니라니까, 저쪽이라고!”
녀석이 갑자기 빽, 소리를 질렀습니다. 언제나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초롱이 녀석, 여러모로 사람을 귀찮게 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그럼 넌 저쪽으로 가, 난 이쪽으로 갈 테니까.”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초롱이 녀석은 울 듯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하다가 정말 혼자 숲길을 따라 들어갔습니다.
“바보 같은 자식! 길도 제대로 모르는 주제에.”
나는 거침없이 숲길을 헤쳐 걸어 나갔습니다. 얼뜨기 같은 녀석과 숲속에 들어오는 게 아닌데, 생각하며 이쯤이면 나오겠지 하고 계속 걸었는데 아무리가도 선생님과 친구들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하다, 분명 이 길이 맞는데.’
어느새 해는 뉘엿뉘엿 지고 나는 완전히 방향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초롱이가 간 쪽이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그 길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이제 어쩌지…’
사방에 어둠이 내리자 숲 곳곳에 찬 공기가 내려앉았습니다. 높게 뻗은 나무 사이로 음울한 산새의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디선가 컹컹 하는 산짐승 소리도 들리는 듯 했습니다. 점점 몸은 무거워지고 다리도 아팠지만 가만히 있는 것이 더 무서워 나는 계속 숲길을 걸었습니다.
‘아, 저기 불빛이다!’
아래쪽을 향해 무작정 내려가다 보니 계곡 물소리가 나는 쪽에서 플래시 불빛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영지야, 김영지!”
“여기, 여기예요! 저 여기 있어요!”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고 곧 사람들이 저를 향해 달려왔습니다. 마을 사람들로 보이는 낯선 사람들, 그런데 그 속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지야!”
내 이름을 힘껏 부르며 달려온 사람, 그 사람은 분명 아빠였습니다. 우리 집 거실의 커다란 가족사진 속에 있는 모습 그대로의, 틀림없는 아빠였습니다.
“아빠...외국에 있다고 했는데...다른 아줌마랑...”
“응, 출장에서 막 돌아왔어. 공항에서 엄마 연락받고 달려온 거야!”
“정말, 정말이야?!”
나는 길을 찾았다는 기쁨보다 아빠가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습니다. 다른 아줌마와 바람이 난 것도, 나와 엄마를 버린 것도 아닌, 정말 출장 중이었던 겁니다.
“영지야, 아빠 손 꼭 잡아.”
아빠는 내 손을 꼭 잡고 수풀을 헤쳐 나갔습니다. 어렸을 때 잡았던 듬직하고 따뜻한 아빠의 손, 나는 그 손에 매달려 연실 아빠에게 종알거리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한참을 산길을 따라 내려와 산 입구에 다다르자 엄마와 선생님이 서성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영지야!”
멀리서도 날 알아본 엄마가 큰 소리로 나를 불렀습니다.
“영지야, 엄마한테 어서 가 봐.”
아빠는 슬그머니 내 손을 놓았습니다.
“싫어, 아빠랑 손잡고 갈 거야.”
아기 때처럼 아빠에게 투정을 부리는 사이, 어느새 엄마가 달려와 나를 끌어안았습니다.
“영지야, 괜찮아? 구조대 아저씨들 올라갔는데 어떻게 혼자 내려왔어?”
“히히, 혼자라니. 엄마도 참.”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나의 모습에 엄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살폈습니다.
“아빠랑 같이 왔잖아, 다른 사람들도 다 같이.”
“아빠? 사람들? 누구?”
“여기.”
나는 좀 전까지 옆에 있던 아빠의 옷깃을 당겨보았지만 그새 아빠는 사라졌습니다. 아빠도, 같이 내려왔던 사람들도, 아무도 없었습니다.
“어, 어디 갔지? 아빠가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는데. 엄마, 아빠 어디 갔어?”
“영지야…”
엄마는 아무런 대답 없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안았습니다.
“아빠가...영지 구해주러 하늘나라에서 오셨구나. 영지야 미안해, 엄마가 미안해 영지야…”
‘하늘나라? 하늘나라라니...이혼도, 출장도 아니고, 하늘나라...’
나는 엄마 품에 안긴 채 까무룩, 정신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실려와 나는 꼬박 하루를 잤습니다. 다음날 저녁이 되서야 일어난 내가 거실로 나가려는데 엄마와 외할머니가 하는 얘기가 들려왔습니다.
“아무래도 김서방이 영지를 살린 것 같구나. 딱한 사람 같으니.”
“그런 거 같아요, 그 사람이…흐흑.”
“유럽 출장 가서 사고만 안 났어도, 저렇게 잘 자란 영지 보고 얼마나 좋아하겠니?”
“그래도 하늘에서 다 지켜보고 있는 걸요, 뭐.”
엄마는 나오려는 눈물을 참으려 천장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역시 아빠가 맞았어. 진짜 아빠였어.”
나는 엄마처럼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무척 기뻤습니다. 아빠가 늘 내곁에 있다는 사실을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까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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