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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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팀장이란 남자를 자주 집에 데려오곤 했다. 처음에는 늦은 밤의 갑작스런 방문에다 늘 떡 벌어진 술상을 요구하는 남편이 얄밉게 느껴졌다.
‘눈치 없이 이 밤에 남의 집에 따라 온 사람은 또 뭐야.’
마치 못해 술상을 차리며 한껏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연주에게 팀장 준혁은 겸연쩍은 얼굴로 미안함을 표했다.
‘하도 아내분 음식 솜씨 자랑을 하면서 붙잡아서, 이렇게 결례를 하게 됐습니다.’
훤칠한 외모에다 매너까지 좋은 준혁은 뽀로통했던 연주의 기분을 곧잘 풀어주었다.
‘그래, 이것도 내조라고 생각하자.’
일주일에도 몇 번씩 그와 저녁을 함께하자 어느 때부턴가 연주도 그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기껏 차린 안주에 몇 차례 술잔이 오가면 남편은 그 자리에 앉아 꼬박꼬박 졸기 시작했고 준혁의 술 상대는 연주의 몫이 되어 버리곤 했다. 결혼과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의 대화도 없어 말에 굶주렸던 연주는 그와의 대화로 세상과의 소통을 다시 하는 기분이었다. 가끔 말을 섞을 때마다 온갖 잘난 척과 무시를 쏟아내는 남편과는 달리 준혁은 어떤 주제에도 매끄럽게 대화를 이끌었고 겸손하기까지 했다.
“팀장님 같이 좋은 분이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셨어요? 괜찮으시면 제 친구 소개시켜 드릴까요?”
“허허, 좋은 반려자를 만나는 게 쉽진 않더라고요. 이 대리는 복 받은 겁니다. 제수씨 같은 아내를 만났으니...“
인사치례로 하는 말일 텐데도 그의 그런 말을 들으면 연주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런 남자랑 결혼하는 여잔 참 좋겠다.’
준혁이 집에 다녀간 날이면 연주의 마음은 늘 싱숭생숭했고 언제부턴가 그의 방문을 은근히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나 오늘 집에 못 들어가.”
남편이 좋아하는 꽃게탕을 끓여놓고 기다리는 연주에게 갑작스레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데?”
“상가집에 가야해, 내일 아침에 들어가서 얘기해.”
“그래? 누가 돌아가셨는데?”
연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편은 전화를 끊어버렸다. 저녁시간에 맞춰 정성스레 준비해놓은 요리를 바라보며 연주의 표정에 쓸쓸함에 배었다.
‘에휴, 오늘도 삼시세끼 혼자네.’
보글보글 끓는 꽃게탕 불을 끄며 주방을 나서려는데 현관벨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야?’
인터폰을 확인한 연주는 문 앞에 서있는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어머, 팀장님이 왜?’
연주는 의아한 생각이 들면서도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남편도 없이 왜 혼자 온 거지? 남편이 없는 걸 모르나?’
연주는 남편도 없는 상황에서 그를 들이는 것이 어색했지만 그대로 문밖에 세워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미안합니다,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그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근데...무슨 일로?”
거실로 그를 들이며 연주는 살짝 들뜬 자신의 목소리를 느꼈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받으며 화끈 얼굴까지 달아올랐다.
“이 좋은 냄새는 뭐예요? 맛있는 거 하셨나 봐요?”
“네에, 그냥...꽃게탕이요. 혹시 저녁 안 하셨으면 식사 하실래요?”
전혀 예상에 없던 말을 불쑥 내뱉은 연주는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러지? 어쩌자고 이런 말을...’
“실례가 안 된다면, 감사히 먹겠습니다.”
허둥대는 연주를 자연스레 스치며 그는 주방으로 향했다.
“요리솜씨가 정말 좋으세요. 이대리는 정말 행운아지, 이런 음식을 매일 먹으니까 말이에요, 하하.”
그는 연주가 차린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런 좋은 음식에 술이 없으니까 좀 아쉽네요.”
그의 말에 연주는 발딱 일어나 냉장고에 있던 소주를 내왔다.
‘남편도 없는데 이래도 되나? 에이,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술이야 항상 마셨던 건데 뭐.’
연주는 그의 잔에 술을 따랐고 한 잔, 한 잔, 술잔이 돌았다. 그렇게 술자리가 무르익고 두 사람의 대화도 깊어졌다.
“연주씨, 행복하세요?”
‘연주씨? 내 이름을 부른 적은 없었는데, 이건 무슨 의미지?’
연주가 생각에 잠겨 대답을 않자 그는 한 팔로 턱을 괴며 지그시 연주를 바라보았다.
“전, 행복하지 않아요. 솔직히, 많이 힘들어요.”
그의 눈빛에도, 목소리에도 가득 슬픔이 배어있었다.
‘이거 뭐야, 고백이라도 하려는 건가? 아, 어쩌지?’
술기운이 확 달아난 연주는 담담한 척 하려 했지만 가슴이 요동쳐 손까지 떨려왔다. 그녀는 애써 평정을 되찾으며 그에게 물었다.
“오늘 무슨 일 있으세요?”
연주의 말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상체를 그녀 가까이 들이밀었다.
“실은...제가 드릴 말씀이 있어서 이대리 없는 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의 말에 연주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렇게 불륜이 시작되는 건가? 아, 어쩜 좋아. 난 이미 결혼한 몸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연주는 이 분위기를 거부하지 않았다. 왠지 다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되찾은 것 같아 은근히 행복감에 빠져들었다.
“사실, 저….”
그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고 빙빙 잔을 돌렸다.
“혼자 가슴앓이 하지 말고 속 시원히 말씀하세요. 팀장님 힘들어 하는 거, 저도 보기 안타까우니까요.”
연주의 머릿속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가 고백을 하면 어찌할 것인가, 남편을 버릴 수 있을까, 주변 시선을 감당할 수 있을까, 수많은 생각이 뒤엉켜 아무것도 답을 내릴 수가 없었다.
“결국...모든 게 다 계획적이었습니다.”
‘계획적? 우리 집에 드나든 게 계획적이라는 건가, 오늘 날 만나러 온 게?’
연주는 굳은 표정으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간절한 그의 눈빛이 이미 모든 걸 말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 집에 찾아오고 날 칭찬했던 게 다 이 남자의 고백이었던 거야. 난 그것도 모르고...’
연주는 뒤늦게 찾아온 진정한 사랑 앞에서 몹시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심정을 눈치 챘는지 그가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부를...확인해 보고 싶어요.”
‘내부를 확인한다고? 이게 무슨 소리지? 내 속마음을 확인한다는 거야, 아니면 설마...나와 속궁합을 맞춰보자는 거야?’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황해서 묻는 연주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는 덥썩, 그녀의 손을 잡았다.
“제발...도와주세요. 연주씨, 제발...”
돌발적인 그의 행동과 간절한 음성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아아, 어쩌면 좋아...’
“그래도 우리가 이러면...”
“브레이크가 풀려버렸어요. 내 힘으론 제어할 수 없었어요.”
연주는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지만 자꾸만 머리가 아득해졌다. 그리고는 문득, 자신이 입고 있는 속옷을 떠올리며 조바심이 밀려왔다.
“저...잠시만 방에 좀...”
안방에 들어와 재빨리 옷장 문을 연 연주는 신혼여행 때 입었던 야사시한 속옷으로 갈아입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아무 일도...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시 그와 마주앉은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더듬더듬 말을 꺼냈다.
“준혁씨...그 마음 충분히 이해해요. 저도 그런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그래도 아직...”
입술을 달싹거리며 겨우 말을 꺼낸 그녀의 곁으로, 그가 어깨를 감싸며 다가왔다.
“제발...저에겐 당신밖에 없습니다. 연주씨만이 절 구할 수 있어요.”
“아아...전 어찌해야 할지...자꾸 이러시면 제가 어떻게...”
바짝 다가와 한 뼘 간격으로 얼굴을 맞댄 그를 보며 연주의 몸이 살포시 그에게 넘어갔다.
‘아아...결국 난 사랑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여자였어.’
연주는 눈을 감고 그의 입술이 포개어지길 기다렸다. 그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끝도 없는 아득함으로 밀려들어갔다.
‘딩동’
따뜻한 그의 입김이 느껴진다 생각한 순간, 현관 벨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뭐지, 이 새벽에 누구야?’
연주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를 주방에 남겨둔 채 거실로 향했다.
‘허억, 어쩜 좋아. 그이가...그이가 왜 벌써...’
연주는 잽싸게 주방으로 달려와 그에게 남편이 왔음을 알렸다.
“어떻게 해요? 그이에게 뭐라고 얘기하죠?”
“사실대로 얘기해야죠. 그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단호한 그의 말에 연주의 불안했던 마음은 싹 가셨고, 그녀 또한 단단히 마음을 굳히며 현관으로 향했다.
‘그래, 한 번 뿐인 인생, 맘 가는 대로 해야지.’
그를 향해 굳은 고개짓을 하며 연주는 현관문을 열었다.
“문 여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중 잠금은 왜 해놓고.”
들어오자마자 짜증 섞인 말을 내뱉는 남편을 보며 연주는 좀 전의 결심을 더욱 굳혔다.
‘그래, 마지막이니까 맘껏 떠들어봐라. 난 이제 너랑 안녕이다.’
남편을 냉랭하게 바라본 그녀는 쌩, 찬바람을 날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그의 옆에 보란 듯이 서서 남편에게 선전포고를 할 작정이었다.
‘어, 어디 갔지?’
주방에 들어선 그녀는 텅 빈 그의 자리를 보고 거실로 뛰어나왔다.
‘화장실에 갔나? 하긴, 그에게도 쉬운 문제는 아니니까. 마음을 가라앉힐 시간이 필요하지.’
남편의 눈치를 살피며 연주는 쌓여있는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뭐야, 혼자 술 마셨어? 참 팔자도 좋다.”
쏘아붙이는 남편의 말에 그녀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도 않았다.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나도 소주잔 하나 줘. 오늘은 그냥 못 자겠다.”
연주는 화장실 문을 힐끔거리며 소주잔을 건넸다. 혼자 고뇌하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남편은 혼자 소주를 따르며 푸념하듯 중얼거렸다.
“내가 팀장님한테 잘 보이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다니...”
남편의 말을 흘려듣던 연주는 귀가 번뜩 했다.
“누구 얘기야?”
“우리 집에 자주 오던 박팀장님, 그 사람 장례식장 다녀오는 길이야.”
“뭐, 뭐라고? 준혁씨가?”
안주를 우물거리던 남편이 커다란 눈을 치켜떴다.
“준혁씨? 그래 그 준혁씨다! 박준혁 팀장님!”
연주는 화들짝 놀라 화장실로 뛰어갔다. 하지만 화장실에도, 방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멍해진 얼굴로 주방에 돌아온 그녀는 남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 넋 나간 사람처럼.”
“박준혁 팀장님이 돌아가셨다고? 언제, 왜?”
“이 여자가 왜 이렇게 발끈해. 자동차 사고였데. 팀장님이 엄청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었는데, 그래서 내가 그렇게 공을 들인 건데...다 물 건너갔어. 회사도 이번 일로 휘청거릴 거야. 워낙 큰 건이었으니까. 휴우.”
“그럼 우리 집에 왔던 그 사람은…”
연주는 멍하니 말을 쏟아내다 재빨리 입을 닫았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 분명 얼마 전에 차량 점검을 받은 걸로 아는데, 왜 갑자기 브레이크가 고장을 일으킨 건지...”
“브레이크…고장?”
연주의 머릿속에 휙, 지난 밤 팀장의 말이 스쳐지나갔다. 모든 게 계획적이다, 내부를 확인해 보고 싶다, 브레이크가 풀려 제어할 수 없었다, 도와 달라, 사실대로 얘기해라, 그제야 연주는 그 말들의 의미를 깨달으며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연주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익명의 누군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둘러대며 팀장이 알려줬던 사실을 이야기했다.
“공익제보자가...왜 하필 우리 집에 그런 제보를 한 거야?”
“당신이 그만큼 중요한 인물인가보지. 이거면 회사도, 당신도 살아날 기회가 있는 거 아냐?”
남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가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며칠 후, 박팀장 사고의 범인이 밝혀졌다. 경쟁 회사의 사주를 받은 같은 과의 직원이 팀장의 자동차에 손을 댔다는 것이 밝혀졌고 그의 증언으로 상대 회사까지 수사에 들어갔다.
“우리 자기 덕분에 나 팀장으로 승진했어, 그리고 그 프로젝트 내가 맡기로 했어.”
어깨를 들썩이며 퇴근한 남편은 연주에게 한 아름 꽃다발을 안겼다.
‘팀장님이 나한테 선물을 남겨주고 가셨구나. 휴우, 그곳에서 예쁜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세요.’
남편과 밥을 먹던 연주는 발갛게 얼굴을 붉히며 쿡, 터지는 웃음을 밥과 함께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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