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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밤, 화려한 드레스 차림의 여자가 정신없이 달리고 있다. 한 방향을 향해 곧게 달려가는 그녀는 늘어지는 드레스와 높은 굽 때문에 한없이 위태로워 보였다. 정성스레 틀어 올린 긴 머리는 풀어진 채 땀범벅이 되었고 머리를 수놓았던 화려한 장신구는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랜 시간 공들인 화장도 반쯤 지워져 있었다. 뒤를 힐끔거리며 도망치듯 달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뒤에서 그녀를 따라오는 검은 그림자도 거친 숨을 뿜어내며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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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전, 저녁 어스름이 하늘을 뒤덮을 무렵 회원제 한식당 기연에서는 특별손님을 위한 요리준비가 한창이었다. 방송활동으로 좀처럼 식당에 얼굴을 비치지 않는 사장 겸 메인 세프 김인석도 손수 요리를 거들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오늘 별채 매화방 손님들은 최고의 VIP다. 모두 정신 바짝 차리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그가 이렇게 정성을 쏟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고의 손님을 위해 마련된 한식당 기연의 하나뿐인 밀실, 매화방에 오늘 최고 중에서도 최상급 거물인사가 예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명이 아니라 둘이었다.
한 사람은 현직 국회의원, 또 다른 사람은 누구나 알만한 유명 기업인이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김인석은 음식 하나하나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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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VIP 전용 주차장에 고급 세단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아, 의원님 오셨습니까?”
“하아,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김인석 셰프는 나이 지긋한 두 남자와 그 일행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사장 김인석은 국회의원 서상도와 식품회사 미르의 회장 고진만 일행을 매화방으로 안내했다. 별채의 매화방은 일반 손님들이 찾는 본관과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이었다. 자그마한 안뜰까지 따로 갖춘 매화방은 독립적인 화장실까지 갖추었다. 고급스럽고 전통적인 인테리어와 장인의 손길이 깃든 공예장식, 우아한 기품이 느껴지는 방이었다. 테이블은 화려한 서양식 탁자지만 강한 색채의 전통문양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국회의원 서상도와 그의 가족들은 매화방 입구를 기준으로 좌측에 미르 회장 고진만의 가족들은 우측에 앉았다. 마치 교섭을 하러온 협상단 같지만 실은 두 집안의 상견례 자리였다.
“고회장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하하, 서의원님이야 말로 힘든 걸음 하셨습니다. 제 아들 녀석이 경영 수업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많은 도움 부탁드립니다.”
“별 말씀을, 제 여식이야말로 걱정입니다. 사회생활 한다고 밖으로만 돌았지 살림을 통 배우지 못해서, 이제 배필을 만났으니 하나씩 가르쳐야 할 겝니다. 내 딸이지만 머리가 영리한 녀석이니 안사돈이 가르치는 재미는 있을 겁니다, 하하.”
모인 사람은 여섯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는 건 서상도와 고진만뿐이었다. 양가의 두 어머니는 은은하고 가식적인 미소만 지은 채 서로를 탐색했고 예비신부와 예비신랑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최고급 만찬이 줄을 이어 들어왔다. 서상도와 고진만은 술까지 나누며 대화를 이어갔고 나머지 사람들은 조용히 식사에 집중했다. 껄끄럽고도 오묘한 식사 분위기를 깬 건 곱게 드레스를 차려 입은 서상도의 딸 서인혜였다.
“식사 중에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상견례 분위기를 깨는 딸을 보며 서상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실례가 아니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한 고회장 부인이 자애로운 미소로 말했다.
“긴장해서 그런가 보네요. 어서 다녀와요. 우린 괜찮으니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서인혜는 살짝 목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못했다.
# 효과음
늦은 시각에 직접 의뢰인을 만나러 가는 건 강산으로선 드문 일이었다. 보통 의뢰인이 사무실로 찾아오거나 전화로 사건을 의뢰하면 수사에 착수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이번에는 달랐다. 국회의원 서상도의 비서관이 비밀리에 강산을 찾아왔고 늦은 밤 고급호텔로 그를 불러들였다.
‘도대체 무슨 사건이길래 이렇게 보안을 신경 쓰지?’
잔뜩 호기심이 든 강산은 서둘러 서상도가 기다린다는 호텔로 갔다. 호텔 발레파킹 직원은 낡을 대로 낡은 강산의 에스유비를 넘겨받으며 따가운 눈총을 보냈다. 이에 아랑곳 않고 강산은 서상도와 만남이 약속된 1101호로 향했다.
- 똑똑
노크를 하자 온더락스로 양주를 들이키던 서상도가 강산을 맞았다.
“늦은 시간에 번거롭게 했군. 한 잔 하겠나?”
“죄송합니다. 근무 중에는 술을 안 마십니다.”
강산은 서상도와 소파에 마주앉았다. 서상도의 날카로운 눈이 강산에게 꽂혔다. 강산도 그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흠, 티비에서 보던 것 보다 체격은 왜소하지만 기세가 대단하군. 역시 정치인답게 욕망이 가득 찬 매서운 눈이야. 저 강렬한 눈이 흔들린 다는 건 뭔가 큰 사건이 있다는 건데, 대체 무슨 일일까? 정치적 위기상황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노련한 정치인이 분노와 슬픔에 찬 눈빛이라니…’
사실 서상도의 보좌관이 찾아왔을 때 강산은 망설였다. 온갖 작당모의를 서슴지 않고 일삼는 서상도였기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선입견만으로 의뢰를 거절하는 것 또한 강산의 성격에 맞지 않아 일단 이야기를 들어보려 온 것이다. 서상도는 강산의 시선을 무시한 채 연실 양주를 들이켰다. 그러고도 한참을 더 뜸을 들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내게 딸이 하나 있소. 올해 스물아홉이 된 딸인데 결혼을 앞두고 실종됐소.”
“네?”
강산의 눈이 놀라움으로 번쩍 뜨였다. 정치적인 일이 아닐까 짐작했던 강산으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상견례 자리에서 감쪽같이 사라져버렸지. 내 생각엔 아무래도 납치 같은데...”
서상도의 핏발 선 눈에 어느새 눈물이 고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론 쉽지 않으시겠지만.”
정치인 서상도에 대해서는 좋은 감정이 아니었지만 딸을 잃은 아버지로서의 그를 마주하자 강산은 안타까움이 느껴졌다. 같이 지내지는 못 하지만 강산에게도 가슴을 적시는 딸이 있기 때문이었다.
“인혜가 식사 도중에 화장실에 간다고 하더군. 긴장해서 그랬는지 그런 일이 벌어지려고 그랬는지, 그리고는 돌아오지 않았어.”
“혹시 돈을 요구하는 전화는 없었습니까?”
“다음 날 전화가 왔어. 인혜를 데리고 있으니 3억을 보내라고, 그래서 바로 돈을 보냈는데 그 후로 소식이 없어. 인혜도 돌아오지 않고.”
“경찰에는 신고하셨습니까?”
“경찰 쪽에 손을 써서 비밀리에 수사를 했지만 아무 소득이 없어. 내 입장이 입장이니만큼 공개수사를 벌일 수도 없는 상황이고.”
강산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회의원 선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라 3선에 도전하는 그로서는 딸의 실종이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강산으로서는 딸보다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중시하는 것이 이해되진 않지만 개인마다 우선순위가 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시군요. 그럼 경찰 조사에서는 특정할 만한 증거가 나왔습니까?”
“진척이 없어. 어디서 어떻게 납치되었는지도 파악 못한 눈치야. 보다 못해 내가 안선생을 부른 것 아뇨!”
서상도는 역정을 내듯 소리치고는 감정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이번에 우리 인혜를 찾아주면 내가 안선생 복직을 도울 수도 있어. 전직 강력반 형사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서상도는 어느새 딸을 찾는 아버지의 얼굴에서 노회한 정치인의 얼굴이 되었다.
“하하,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복직은 제 힘으로 하겠습니다. 현재로선 탐정 일에 만족하고 있고요. 의뢰비만 확실히 주십시오, 하하.”
대화를 마친 강산은 속없는 얼굴을 내보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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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대박! 서상도 의원 딸 서인혜요?”
다음날 강산이 사무실에 출근해 사건을 이야기하자 미나가 크게 동요했다.
“왜? 아는 사람이야?”
강산은 요란스럽게 반응하는 미나를 흘낏 쳐다보았다.
“직접 아는 건 아니고 예전에 티비에 나온 거 봤거든요. 국회의원 딸인데 아버지 도움을 안 받고 사회적 기업을 설립한 청년 사업가 서인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무료로 결혼컨설팅을 해주고 결혼자금도 지원해 준다고요. 일종의 결혼정보업체긴 한데 사회적 상생기업인 셈이죠.”
“근데 그게 왜? 국회의원 딸은 그런 거 하면 안 되나?”
“그건 아니지만, 생각해 보세요. 국회의원 아버지의 인맥과 재력을 이용하면 쉽게 큰돈을 벌 수 있잖아요? 유학도 다녀왔으니까 대학교수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거고요. 근데 서인혜 그 사람은 전혀 돈이 안 되는 일을 선택했어요. 멋지지 않아요?”
강산은 납득 안 된다는 얼굴로 미나를 보며 말했다.
“미나 너까지 왜 그러냐? 그게 정상적인 거잖아? 비정상을 정상으로 보고 정상을 비정상으로 인식하는 거 아냐?”
“치이, 탐정님같이 살다간 평생 이런 변두리 사무실 못 벗어난 다고요. 탐정님 설마, 서상도 의원한테도 무지 뻣뻣하게 대한 거 아니에요?”
“후훗, 글쎄. 아무튼 당장 조사 시작해야하니까 준비하자고!”
“네, 알겠어요.”
미나의 시원스런 대답을 들으며 강산의 머릿속은 이미 수사계획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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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서인혜가 사라졌다는 한식당 기연이었다.
“예약하셨습니까?”
강산이 큰 기와집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곱게 생활한복을 차려입은 직원이 물었다.
“김인석 셰프님하고 통화한 안강산이라고 합니다.”
“아, 안강산 탐정님? 전 안내를 지시받은 매니저 나진영입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단아한 스타일의 여자는 친절하게 강산을 안내했다. 그녀를 따라 본관을 가로지르자 별채로 향하는 또 다른 대문이 나왔다. 그곳에는 본관과 완전히 분리된 아담한 별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이 매화방입니다. VIP를 위한 최고급 방이지요.”
매화방은 전통적인 기와집 형태로 꾸며진 별채였다. 방에 들어서기 전 강산은 작게 마련된 안뜰로 나가 주변을 둘러봤다. 스무 평 남짓의 정원에는 유려하게 굽은 금송과 잘 다듬어진 석상이 고즈넉한 분위기로 서 있었다. 마당 한쪽에는 작은 초가집도 있었다.
“그런데 저 초가집은 무슨 용도의 공간입니까?”
“아, 매화방 전용 화장실겸 파우더룸인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죠?”
“리모델링 중이거든요. 전체적인 분위기를 고려해서 초가집으로 지었는데 아무래도 화장실은 현대식 공간으로 꾸미는 게 낫겠다는 의견이 있어서요. 어차피 본관 화장실이 별채에서 멀지 않고 시설도 넓어서 이용하시는 데 불편은 없으십니다.”
강산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인 후 기와집 처마 밑을 살폈다.
“이곳엔 씨씨티비가 없습니까? 본관에는 꽤 많이 설치돼 있던데?”
“네, 아무래도 별채를 찾는 손님들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해서 없앴습니다.”
“그렇군요.”
‘하아, 이번 사건은 쉽지 않겠네.’
강산은 깊게 숨을 내쉰 후 매니저 나진영에게 물었다.
“혹시 지난 달 24일 토요일, 근무하셨습니까?”
“네, 토요일은 늘 근무합니다.”
“그럼 그날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거나 평소와 다른 일이 생겼다거나 하지 않았습니까?”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글쎄요, 워낙 VIP고객들이라 다른 날보다 더 신경을 썼고 셰프님까지 직접 나와서 지휘를 한 터라 또렷이 기억하는데 제가 아는 한 실종사건 외에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아무래도 저희 식당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곳이어서 평소에도 그런 불미스러운 일은 거의 없거든요.”
“흐음, 알겠습니다. 이번엔 본관 쪽으로 가볼까요?”
“그러시죠.”
강산은 본관으로 걸음을 옮겨 이곳저곳을 살폈다. 개미굴처럼 이어진 복도 양쪽으로 방들이 쭉 이어진 본관은 전체적 분위기가 별관과 비슷했다. 홀 없이 모두 개별실로 이루어진 방뿐이었고 양 끝에 화장실이 있었다. 그리고 본관과 별채 경계선 부근에 메인 파우더룸 겸 화장실이 있었다.
“잘 둘러봤습니다.”
강산은 본관 씨씨티비 영상 복사본을 입수해 사무실로 돌아왔다. 경찰이 별 특이점이 없다고 판단한 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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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돌아온 강산은 곧장 영상을 돌려봤다. 미나도 옆에 와서 같이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 저 사람! 저 사람이 서인혜에요. 어머, 드레스 예쁘다! 티비에서 볼 땐 완전 서민적이었는데 저렇게 꾸미니까 다른 사람 같네요.”
미나의 말대로 영상 속 서인혜는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부모님과 함께 주차장에서 별채 매화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흐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데.”
강산은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겼다.
“서인혜씨 찍힌 영상이 이게 다에요? 그럼 더 볼 것도 없겠네요. 경찰도 아무것도 못 건졌다면서요?”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지. 난 영상 다 보고 퇴근할 거니까 넌 먼저 퇴근해. 그래봐야 세 시간짜리 영상인데 이런 게 총 일곱 개니까 이제 스무 시간만 더 보면 되겠지. 내일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눈알이 빠지도록 보다보면 끝나지 않겠니? 미나야.”
“어휴, 탐정님도! 가란 얘기에요, 말란 얘기에요?”
미나는 강산을 흘겨보며 입을 비쭉거렸다.
“야근할 테니까 대신 야식은 탐정님이 책임져요!”
미나는 강산에게 유에스비를 받아 자신의 자리로 갔다. 컴퓨터를 켜는 미나를 보며 강산의 얼굴엔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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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강산은 뼈저리게 느꼈다. 사건에 대한 그의 집념이 아무리 크더라도 쏟아지는 잠은 어쩔 수 없었다. 영상을 들여다본 지 한 시간쯤 지나자 그는 꼬박꼬박 졸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움직임 없는 영상이 계속 반복될 뿐이었다. 반면 엉겁결에 남은 미나는 말똥말똥 눈이 반짝였다. 푹푹 꺾여드는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어대던 강산은 갑자기 깜짝 놀라 일어났다.
“어, 영상에 별 거 없었어?”
“네, 지금까진요.”
미나는 강산을 쳐다보지도 않고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강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탐정님, 어디가요? 아직 확인 안 한 영상 많이 남았잖아요.”
“응, 미나 네가 보고 있잖아. 영상 보는 건 나보다 네가 집중력이 높은데 나까지 볼 일 없지 않겠어?”
미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강산을 쏘아봤다.
“근데 미나야, 네가 웬일로 이렇게 열심히냐? 너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미나는 피식 웃더니 민망한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가 부자들만 이용하는 식당이잖아요. 제가 이런 부류의 사람들 언제 구경하겠어요? 게다가 스타일 좋고 멋진 남자들이 엄청 많아요. 후후.”
의외의 대답에 강산은 뒷목을 잡았다.
“좋아, 그럼 이번 영상분석은 네가 전담해라. 난 내일 서인혜 지인들 탐문할 준비나 해야겠다.”
“아니, 그게…”
미나가 붙잡기도 전에 강산은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하아, 왜 당한 기분이지?”
강산이 나간 문을 멍하니 보던 미나는 다시 컴퓨터 화면에 눈이 갔다.
“어머, 저 남자 스타일 너무 멋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도배했네. 저게 돈이 얼마야?”
미나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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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강산은 해커 태상에게 계좌추적을 부탁했다. 국회의원 서상도가 납치범에게 돈을 보낸 계좌였다. 미나는 여전히 사무실에 처박혀 영상을 분석했고 강산은 서인혜와 관련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서인혜가 사라진지 벌써 한 달이 넘었어. 흔적 하나 남기지 않은 치밀한 수법으로 봐서 전문가나 면식범일 가능성이 농후해. 서인혜의 동선을 이렇게까지 꿰뚫기는 쉽지 않을 테니까.’
강산은 서인혜가 운영했던 사회적 기업 소울메이트로 향했다. 사무실은 변두리 동네의 허름한 건물에 위치했다. 좁은 사무실에는 다섯 명의 직원들이 바삐 일을 하고 있었고 그녀 없이도 순조롭게 운영되는 듯했다. 지금은 서인혜와 같이 사업을 일군 대학동기 김나리가 사장직을 인계받은 상태였다. 강산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김나리는 회의실로 안내했다.
“바쁜 시간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강산은 회의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김나리와 마주했다. 작은 키에 강단 있게 생긴 김나리는 대학생 같이 어린 외모에도 목소리가 걸걸했다.
“아뇨. 다른 일도 아니고 인혜 때문인데 뭐든 도와야죠.”
허스키한 목소리 아래로 짙은 슬픔이 배어있었다.
“두 분이 친하셨다고요?”
“네, 죽이 잘 맞는 친구였죠. 극단적으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가? 인혜와 저는 서로에게 호기심이 많았어요. 부잣집 딸과 산동네 출신 소녀가장, 정말 이질적이죠? 후훗.”
“그렇군요. 서인혜씨는 결혼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두려고 했다던데요?”
강산의 질문에 김나리는 후욱 한숨을 내쉬었다.
“네, 애석하게도요. 사실 인혜는 여길 계속 운영하길 원했지만 아버지가 워낙 엄해서 어쩔 도리가 없는 것 같더라고요. 그만두겠다는 얘길 할 때도 굉장히 아쉬워했어요.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는데 실종이라니 믿어지지 않아요.”
김나리의 얼굴에 잿빛 그늘이 졌다. 강산은 잠시 기다렸다가 다음 질문을 이었다.
“서인혜씨와 미르 후계자는 만난 지 석 달도 안 됐다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집안끼리의...”
강산이 말을 흐리자 김나리가 이어받았다.
“맞아요. 정략결혼. 하아, 아이러니죠? 사람들의 소울메이트를 찾아주겠다고 회사를 차렸는데 정작 본인은 정략결혼의 희생자라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김나리의 걸걸한 톤이 고음과 저음을 넘나들며 흥분했다.
‘말이 되는 일보다 말이 안 되는 일이 더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니 뭐.’
강산은 고갯짓으로 그녀의 의견에 동의를 표하며 다시 물었다.
“김나리씨 개인적 의견으로는 서인혜씨를 납치하거나 위해를 가할 걸로 추정되는 인물이 있습니까?”
“글쎄요, 굳이 뽑으라면 한 사람 있기는 한데...”
“그게 누굽니까?”
강산의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어렸다.
“인혜 전 남자친구요. 헤어진 지 2년도 넘었는데 최근에 다시 연락이 오는 것 같았어요. 집착이다 싶을 정도로.”
“집착이요?”
“저도 자세한 건 모르지만 그 사람한테 연락이 오고 나서 인혜가 핸드폰 번호를 바꿨어요. 그래도 어떻게 알았는지 또 전화가 오더라고요. 한 번은 회사에 찾아오기까지 했고요.”
강산은 김나리에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서인혜의 전 남자친구 이요섭이 다니는 K기업에 찾아갔다.
“이대리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젠데요? 벌써 석 달은 된 것 같은데?”
K사 마케팅팀을 찾아가자 퉁퉁한 체격의 팀장이 연실 핸드폰을 힐끗거리며 대답했다.
“혹시 어디로 이직했는지 아십니까?”
“그것까지는 모르죠. 아시겠지만 회사라는 데가 같이 일할 때는 동료지만 나가는 순간 남이 돼버리는 곳이라, 후훗.”
“아, 그렇군요.”
회사에서 나온 강산은 팀장이 알려준 이요섭의 주소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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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은 왜 찾아요?”
이요섭의 아파트 현관 앞에서 강산은 그의 아버지와 마주쳤다. 마침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이던 그는 강산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물었다.
“아드님 도움이 좀 필요해서 그럽니다. 혹시 이요섭씨가 여기 거주하는 게 맞습니까?”
“맞긴 한데, 그 녀석 지금 집에 없어요.”
“네? 그럼 어디에?”
“집에 원체 안 들어와서 나도 그 녀석 얼굴 보기 힘듭니다. 일주일에 한 번이나 들어오는지, 원.”
강산은 쩍 입맛을 다시며 실망한 얼굴로 돌아섰다. 이요섭의 아버지가 강산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우리 요섭이가 무슨 사고라도 친 겁니까?”
“아, 아닙니다.”
강산은 이요섭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듯 했지만 묻기를 포기했다.
‘어차피 제대로 대답을 않겠지. 아들 일이니까,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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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이요섭의 아파트 근처에 차를 세워 두고 잠복을 시작했다. 강력반 형사시절엔 자주 했던 일이지만 탐정일에 뛰어들고 나선 오랜만이었다.
“간만에 하려니 힘드네. 하이고, 삭신이야.”
다음날 아침까지 꼬박 하루 동안 꼼짝 않고 차에 있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다. 미나였다.
“탐정님, 영상에서 의심스런 장면을 발견했어요.”
“그래? 뭔데?”
피곤으로 찌들었던 강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서인혜가 본관 화장실로 들어가는 장면이요.”
“뭐라고? 경찰 쪽에선 그런 얘기 없었는데?”
강산의 머리에 탁 하고 빛이 들어왔다.
‘경찰에선 서인혜가 매화방을 나오자마자 사라진 걸로 추정하고 있어. 하지만 서상도의 말대로 서인혜는 실제로 화장실에 갔어. 그렇다면 범행은 그 이후에 벌어졌다는 얘긴데. 범인은 서인혜를 지켜보며 적절한 순간을 노렸다는 건가?’
강산이 미나에게 뭔가를 더 물으려는데 멀리서 맥없이 걸어오는 이요섭이 보였다.
“미나야, 일단 사무실에서 대기! 일 처리하고 들어갈게.”
강산은 차에서 내려 이요섭에게 다가갔다.
“이요섭씨?”
“누구시죠?”
이요섭은 밤을 샌 사람처럼 눈이 퀭하게 꺼져 있었다.
“서인혜씨 실종사건 조사차 나왔습니다. 몇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인혜가 실종됐다고요? 언제, 어디서요?”
초점 없던 이요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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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이요섭을 데리고 근처 국밥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며칠이나 굶은 사람처럼 순식간에 설렁탕을 비웠다.
“서인혜씨가 실종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혹시 지난달 24일 저녁에 뭘 하고 계셨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참고로 토요일입니다.”
강산의 질문에 이요섭은 숟가락질을 멈추고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훗, 형사님은 지난달 24일 아침에 뭐 먹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럼요. 전 아침엔 늘 라면을 먹습니다만.”
“아니, 제 말은…”
강산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언짢으실 수도 있지만 이요섭씨가 그날 뭘 했는지 말씀해주셔야 서로 간에 귀찮은 일이 줄어들 겁니다. 시간은 충분히 드릴 테니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요섭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잠시 고민에 잠겼던 그는 이내 입을 열었다.
“아마 집에 있었을 겁니다. 별 일 없으면 늘 집에 있으니까요.”
“그래요? 아버님 말로는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하던데요? 게다가 헤어진 지 2년이 지난 서인혜씨에게 최근 집착에 가까운 연락을 했던데, 아닌가요?”
“그건, 아무튼 난 인혜랑 아무 상관도 없으니까 더 이상 찾아오지 마세요!”
이요섭은 신경질적으로 내뱉고 설렁탕집을 나가버렸다.
‘흐음, 역시 의심이 가는 녀석이야. 아까 아버지도 그렇고 뭔가 숨기는 게 있어.’
강산은 해커 태상에게 연락해 이요섭에 대한 조사를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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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온 강산은 미나가 발견했다는 의심스런 영상을 확인했다. 화려한 드레스에 곱게 머리를 틀어 올린 서인혜가 사람들 틈에 끼어 본관 화장실에 들어가는 장면이었다. 본관 손님으로 보이는 다른 여자들도 상견례나 돌잔치를 하러왔는지 하나같이 화려한 차림이었다. 언뜻 보면 모두 일행으로 보였다.
“하아, 여자들 드레스도 머리도 화장도 왜 내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이냐?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구분이 안 돼. 경찰도 그래서 서인혜를 놓친 건가?”
“여기 잘 보세요. 서인혜씨 드레스에 박힌 구슬장식은 다른 드레스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고급스러워요. 머리 장식이랑 틀어 올린 스타일도 보통 디자이너의 솜씨가 아니고요. 분명히 유명 헤어숍 작품일 거예요. 후훗.”
미나는 어깨에 잔뜩 힘을 주며 말했다.
“경찰은 서인혜가 매화방을 나오자마자 사라졌다고 판단했어. 그런데 이렇게 되면 화장실에 가긴 간 거네? 근데 시간차만 날 뿐 이것만으론 별 의미가 없잖아?”
미나는 씨익 미소를 짓고는 빨리 감기로 영상을 돌렸다.
“진짜는 지금부터에요. 분명히 화장실에 들어가는 모습은 잡혔는데 나오는 장면이 없어요. 식당 문을 닫을 때까지 계속이요.”
“어, 그건 이상하네?”
강산은 영상의 끝까지 샅샅이 훑어봤다. 하지만 끝내 서인혜의 모습은 없었다.
“헛, 이거야...들어간 사람은 있는데 나온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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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식당 휴식시간을 틈타 다시 기연을 찾아갔다. 매니저 나진영은 전혀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강산을 대했다.
“몇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습니다.”
“얼마든지요.”
그녀는 일관된 미소로 답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본관 화장실을 확인해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나진영은 화장실 입구로 강산을 안내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공간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왼쪽은 파우더룸, 오른쪽은 화장실, 둘 다 깊고 널찍한 공간이었다. 바닥에 설치된 은은한 미등이 마치 아늑한 휴게공간에 들어선 듯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무슨 화장실에 소파가 다 있네? 유리장 안에 건식 정원까지 꾸며놓고.’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피던 강산은 화장실 가장 안쪽 칸 맞은편에 있는 창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흐음, 사람 한 명은 충분히 빠져나갈 크기잖아?’
하지만 타고 넘기에는 너무 높은 창이었다. 환기를 위해 설치한 창이라 사람의 눈높이보다 한참 높게 설치한 듯했다.
‘입구 씨씨티비에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안 잡혔다는 건 다른 곳을 통해 나갔다는 뜻인데. 아무리 봐도 그럴 만한 곳은 이 창밖에 없어.’
하지만 납치범이 서인혜를 끌어올려 밖으로 넘기기에는 높은 위치였다. 설령 무슨 수를 써서 넘겼더라도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범인이 최소 두 명 이상이라는 건가?’
강산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매니저 나진영을 불렀다.
“혹시 이곳 청소담당 직원분을 만나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잠시 후 청소담당 직원이 강산 앞에 왔다.
“지난달 24일 토요일, 근무하셨나요?”
“네, 제가 쉬는 날이 격주 월요일이니까 주말엔 항상 일을 합니다.”
지긋한 나이에도 눈매가 또렷한 직원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강산을 보았다. 납치사건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혹시 그날 저녁식사 시간쯤에 기억에 남는 특별한 일은 없었나요?”
“특별한 일이라…”
그녀는 회상을 하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하아, 글쎄요. 청소일이라는 게 워낙 반복되는 일이라…거기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나서 떠오르는 게 없네요.”
“알겠습니다.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여기로 연락 주십시오.”
강산은 그녀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창문의 건너편, 건물 바깥쪽으로 이동했다.
‘창문을 빠져나오면 바로 뒤쪽 창고로 이어지네. 여기도 역시 씨씨티비가 없어. 하, 참.’
서인혜가 화장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고 가정해도 그 다음의 행방은 또 다시 미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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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 태상이 이요섭의 신상정보를 보내오자 강산은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 현장으로 출동했다.
‘흐음, 어두침침하군.‘
강산이 도착한 곳은 사설 카지노였다. 먼지 나는 카펫을 밟으며 몇 발짝 걷자 구석자리에 웅크리고 앉은 이요섭이 보였다. 블랙잭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은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카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상이 보낸 자료대로 도박중독이었군. 완전히 빠져들어서 회사까지 그만두고, 서인혜에게도 그래서 연락을 시도한 거고. 그렇다면 도박 빚을 갚기 위해 서인혜를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강산은 멀찌감치 서서 빨대로 쪽쪽 음료를 들이켜며 이요섭의 게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돈을 다 잃고 어깨가 축 늘어져 일어서는 이요섭을 강산이 잡아챘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이요섭의 눈이 흔들렸다. 그서도 잠시,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이제 아시겠어요? 내가 왜 한 달 전 토요일 저녁을 기억 못 하는지? 기억 할 수가 없지. 오늘이 몇 일인지도 모르는 걸, 후훗. 의심스러우면 직원들한테 물어봐요. 여기 붙어 있은 지 벌써 세 달도 넘었으니까.”
확인한 결과 이요섭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씨씨티비까지 체크했지만 이요섭은 지난달 24일 꼬박 이곳에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서인혜를 납치한 거야? 면식범의 소행이 아니라 순전히 돈을 노린 제 3자의 범행? 돈을 보냈는데도 한 달째 피해자를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건, 설마 피해자의 안전에 문제가?’
강산은 애써 머리를 털어내며 허탈한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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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요섭의 알리바이가 명확해지자 강산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서인혜와 둘도 없는 친구 채신아였다. 해커 태상이 넘긴 자료에 의하면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던 두 사람의 통화 기록이 실종 이 주 전부터 끊긴 상태였다. 충분히 의심이 가는 인물이었다. 강산의 연락을 받은 채신아는 서인혜의 실종소식을 듣자 부리나케 뛰어나왔다. 두 사람은 그녀의 자택이 위치한 변두리 동네의 커피숍에서 마주했다.
“서인혜씨가 사라진 걸 전혀 몰랐습니까?”
“절연을 한 상태라…전혀...”
아직도 앙금이 남았는지 그러잖아도 틀어진 그녀의 입술이 더욱 삐틀어졌다.
“중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다고 들었는데 왜 갑자기 사이가 틀어진 겁니까?”
“그게 실은…”
껄끄러운 질문이었던 듯 채신아는 좀처럼 대답을 못하고 눈길을 피했다. 강산은 가만히 그녀를 지켜보다 화제를 돌렸다.
“혹시 서인혜씨 결혼소식은 들으셨습니까?”
“네, 그건 알고 있어요. 부모님 강요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다고. 본인이 세운 회사 이름처럼 인혜 걘 정말 소울메이트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 애였는데.”
“인혜씨는 그 결혼을 원치 않았던 거네요?”
“그럼요. 그런데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예요. 인혜 입장에선 어차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가능성이 없었으니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채신아는 걱정스런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곤 소곤거리듯 말했다.
“이제껏 인혜가 사귄 남자들, 끝이 별로 안 좋았거든요. 대학 때 사귄 첫 남자친구는 갑자기 군대에 가더니 연락을 끊어버리고, 두 번째 남자친구는 말도 없이 유학을 가더니 소식이 끊기고, 2년 전 마지막으로 사귀었던 남자는 다른 여자와...”
“2년 전이요? 혹시 그 사람 이름이 이요섭...”
“아, 맞아요. 요섭씨. 고급 술집 사장과 만나는 걸 인혜한테 딱 걸렸죠. 근데 나중에 들은 얘긴데 인혜는 아무래도 아버지를 의심하더라고요. 인혜에게서 남자친구를 떼어내기 위해서 손을 쓴 게 아닌가 하고요.”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강산은 서상도라면 충분히 그럴 만한 사람이라 생각하며 그의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어차피 좋아하는 상대를 만날 수도 없고 부모님 뜻도 워낙 완고해서 그 남자와 그냥 결혼할 줄 알았는데 역시 억지로 꿰맞춘 일에는 이상한 사고가 생기네요.”
채신아의 얘기에 흠뻑 빠져 있던 강산은 문득 그녀의 옷차림에 눈이 갔다. 패션에 민감하지 않은 강산의 눈에도 뭔가 조화롭지 않은 느낌이 물씬 들었다.
‘재킷은 저렴한 브랜드인데 스카프는 고급스럽고, 목걸이나 반지는 모두 도금 제품인데 신발은 명품이고, 뭔가 일관되지 않은데? 최근 생활적인 변화를 심하게 겪은 건가?’
“다시 아까 얘기로 돌아가서 인혜씨와는 왜 절연을 한 건가요?”
강산이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자 입이 풀린 그녀는 술술 털어놓았다.
“창피하지만 돈 문제에요. 제가 급전이 필요해서 빌려달라고 했는데 안 빌려줘서, 돈이 있으면서도 말이죠.”
“상대가 돈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시죠?”
채신아의 입이 다시 비틀어졌다.
“오래된 친구 없으세요? 친구지간이면 그 정도는 다 안다고요. 제가 새로 장사를 시작하게 되서 딱 육 개월 동안, 5천만 융통해 달라고 했는데 본인도 급히 쓸 데가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남모르는 사람한테는 사비로 결혼자금까지 빌려주던 애가 저한테는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던지 너무 무안하고 괘씸해서...물론 제가 인혜한테 돈을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빌려주는 거야 인혜 마음이지만 그땐 상황이 너무 급하기도 하고 달리 빌릴 데도 없던 상황이라...속 좁은 제가 친구관계까지 망쳐버린 거죠, 뭐.”
“돈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보다시피 급하게 집 팔아서 변두리로 왔잖아요.”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혹시 지난 달 24일 토요일 뭐 하셨는지 기억하시나요?”
“지난 달 24일이요?”
채신아는 핸드폰을 꺼내 캘린더를 살폈다.
“아, 그날 이사했네요. 아침부터 정신없었어요. 짐정리도 밤늦게 끝났고요. 여기 보이시죠. 이삿짐센터 직원이랑 문자 주고받은 거.”
채신아는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렇군요. 오늘 실례 많았습니다.”
강산의 정중한 인사에 채신아는 머쓱한 미소를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확인 차원에서 강산은 그녀의 뒤를 밟은 후 주변 부동산을 탐문했다. 확인 결과 골목 끝 반지하방에 채신아가 이사 온 것은 정확히 지난달 24일 오후, 거짓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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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로 돌아온 강산은 허탈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았다. 일주일 넘게 쫓아다녔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다시 사건을 정리했다.
‘예비신부가 상견례 당일 화장실에 간다고 나갔다가 사라졌다. 씨씨티비에 잡힌 거라고는 예비신부 서인혜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 뿐, 의심이 가던 두 인물, 즉 전 남친 이요섭과 절친 채신아는 각각 명확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한식당 기연에서 시작해야 하는 건가?’
강산은 급한 마음에 태상에게 연락했다. 범인의 계좌번호에 관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잖아도 막 연락하려던 참인데, 계좌주인을 찾아내긴 했는데요. 계좌 소유주가 의외에요.”
“무슨 소리야? 의외라니?”
“사람이 아니라 단체에요. 그것도 복지 재단, 참사랑 재단이라고.”
참사랑 재단이라면 강산도 들어본 적 있다. 사회의 어두운 곳에 온정을 베푸는 단체로 허울뿐이 아닌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곳으로 평가되는 곳이었다.
“하,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강산이 재단 측과 직접 통화한 결과 한 달 전쯤 3억이 입금된 게 사실이라고 했다. 기부자는 서상도, 재단 측에선 독지가의 온정의 손길이라고 여기고 정상적으로 기부금을 집행했다고 한다. 강산이 서상도 의원에게 상황을 알리자 그 또한 당황했다.
“흐음, 그건 일단 선의로 기부한 걸로 치고 잊읍시다. 그나저나 우리 인혜 찾는 건 어떻게 되갑니까? 살았는지 죽었는지 소식이라도 알면 좋으련만.”
강산은 그저 묵묵히 그의 말을 듣고 있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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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납치범이 기부를 했다니? 납치범이 대체 왜...’
강산이 무거운 마음으로 고민에 잠겨 있는데 사무실 전화가 울렸다. 한식당 기연의 청소담당 직원이었다.
“저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아무래도 그날이 맞는 것 같아서...”
“네, 말씀하십시오.”
강산은 허리를 세우고 통화에 집중했다.
“저희 남편이 낚시를 엄청 좋아해서요. 주말마다 낚시를 다니는데, 아 글쎄, 팔도에 안 가본 낚시터가 없다니까요. 어제도 낚시를 다녀왔는데 들어오면서 낚시의자를 턱 패대기치는데...”
“저기, 여보세요?”
강산은 잘못 걸려온 전화인가 싶어 다시 발신인을 확인했다.
“아, 그러니까 남편 때문에 그 기억이 떠올랐다고요. 그날 화장실에 낚시의자가 있었다는 걸요.”
“낚시의자요? 그날이 확실한가요?”
강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도 긴가민가해서 확인을 했거든요. 식당에 손님이 두고 간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데 분실한 날짜를 써 붙여서 보관을 한답니다. 그래서 날짜를 봤더니 24일, 그날이 맞더라고요.”
강산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가며 증기기관차처럼 폭주했다. 생각에 잠긴 강산이 아무 대꾸도 않자 직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별로 도움이 안 됐나요? 혹시나 해서 전화를 한 건데 역시 아닌가 보네. 낚시의자에 노끈이 달린 건 얘기할 필요도 없겠네.”
“노끈? 낚시의자에 노끈이요? 제가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강산은 전화를 끊자마자 미나를 대동하고 기연으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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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에 도착한 강산은 먼저 낚시의자를 살폈다. 낚시의자 귀퉁이에는 붉은 노끈이 끊어진 채 팔랑거렸다.
“흐음, 낚시의자가 고급 식당 화장실에 있었다?”
옆에 있던 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긴 하네요. 여기 분위기상 전혀 안 어울리는데요?”
“그렇지? 그럼 이쪽으로 와봐.”
강산은 식당 측에 양해를 구하고 미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범인은 여기서 낚시의자를 밟고 창을 넘었을 거야.”
“서인혜씨를 먼저 밖으로 내보내고요? 그럼 밖에서 다른 범인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가요?”
강산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범인이 두 명이라고 치면 화장실 안쪽에 한 명, 창 바깥쪽에 한 명이 있었겠지. 영상에서 보면 서인혜씨와 함께 들어온 사람은 모두 여자들이었으니까 범인은 여자라고 추정할 수 있어. 근데 서인혜씨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화장실을 나온 후 각자의 방으로 갔어. 한 명도 빠짐없이 말이야.”
“손님을 가장한 범인의 조력자가 있었을 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지. 밖에서 대기하던 범인이 서인혜씨를 옮기는 동안 안에 있던 조력자는 식사를 마치고 유유히 빠져나간다. 그런데 화장실을 나온 사람들 조회한 결과 의심이 될 만한 사람은 없었어. 여긴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라 그건 편하더라고, 후후.“
미나가 답답하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아니면 범인 둘 다 창을 통해 외부에서 들어온 거 아닐까요?”
“이 창은 안에서 밖으로는 열리지만 밖에서는 여는 게 불가능해. 미리 어떻게든 창을 열어놨다고 해도 그 붐비는 시간에 안쪽 상황도 모르고 넘어왔다간 분명 소동이 일었겠지. 한창 저녁시간이라 손님들이 꽉 차 있었으니까. 그리고 노끈, 이 노끈의 쓰임새는 여전이 미궁이고.”
“아,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데려갔다는 거야?”
미나는 낚시의자 귀퉁이에 매달린 노끈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불쑥 뭔가를 깨달은 듯 강산을 바라보았다.
“설마...서인혜씨가...”
“후후, 스스로 창을 넘었다. 빙고!”
“근데 서인혜씨는 화장실에 들어갈 때 아무 것도 안 들고 있었잖아요? 이 낚시의자는 어디서 나타난 거죠?”
“아마도 서인혜씨는 창문을 통해 누군가로부터 접이식낚시의자를 건네받았을 거야.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넘어간 후 다시 노끈을 당겨 낚시의자를 빼내려 했겠지. 증거를 없애려고 말이야. 근데 운 없게도 노끈이 떨어져 버렸네.”
“탐정님 말씀은 결국 조력자가 있었다는 거네요?”
“그렇지.”
“근데요, 탐정님. 서인혜씨 스스로 도망을 친 거라면 그냥 본관 입구를 통해 도망치면 될 걸 왜 이렇게 힘든 방법을 선택했을까요?”
“그게 이제부터 우리가 해결할 숙제지. 이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 왜 생겼을까, 조력자의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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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의자를 들고 혼자 사무실로 돌아온 강산은 노끈의 매듭부분을 유심히 관찰했다.
“매듭을 보면 전형적인 고리 매듭이야. 이건 어부들이 주로 배를 정박할 때 쓰는 매듭인데...”
강산의 눈에 낚시의자 기둥의 녹슨 단면이 들어왔다.
“요즘 낚시의자는 웬만한 물에 끄떡없는데 이렇게까지 녹이 슬었다는 건 소금 섞인 물, 즉 해풍에 의한 녹일 가능성이 크겠군.”
강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고리 매듭에 해풍이라...아무래도 조력자는 바닷가 지역 인물일 가능성이 높겠군!”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강산은 희망의 소리를 내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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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여러 증거와 정황으로 미루어 서인혜 스스로 도망친 것이라 판단했다. 조력자만 찾으면 서인혜의 신병을 확보할 수 있겠다 판단한 강산은 조력자 찾기에 주력했다.
‘대체 누굴까? 주목할 사람이 없었는데.’
강산은 태상에게 연락해 서인혜의 최근 6개월 통화기록을 부탁했다. 태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료를 보내왔다.
“에휴, 이거 또 밤샘이구나, 밤샘.”
강산은 일일이 문자와 통신기록을 확인했다. 그러기를 열 시간, 드디어 특이점을 발견했다.
“어, 이 번호는 뭐야? 지역번호는 같은데 뒷번호가 계속 바뀌잖아? 사건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끊겼고.”
번호를 추적하자 모두 삼척의 공중전화로 확인됐다.
“흐음, 조력자는 분명 삼척에 거주하는 인물이야. 이 정도면 보통 관계가 아닐 텐데, 근데 서인혜는 삼척과 어떤 연관도 없었단 말이지. 사적으로 연관이 없다면 공적으로 관계가 있을 수도?”
강산은 다시 서인혜가 운영했던 회사를 찾아가 사장 김나리를 만났다.
“혹시 서인혜씨와 친했던 직원 중에 삼척 출신 없습니까?”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그럼 서인혜씨가 남자 고객들과 친분을 쌓는 경우는요?”
“드물긴 한데, 있어요. 등록한지 오래된 고객분들 중에 계속 짝을 못 찾는 분들은 인혜가 직접 매니지먼트 하기도 했어요.”
“그래요? 그분들 명단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강산은 김나리가 준 자료를 검토했다.
“아, 여기!”
강산은 삼척을 연고지로 가진 남자를 발견했다. 직업란에 수산업 종사자라고 적힌 걸 보면 가능성이 농후했다. 강산은 재빨리 그의 신상을 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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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에스유비 차량을 몰고 삼척으로 향했다. 남자의 이름은 도인호, 소울메이트의 사장 김나리도 그를 기억했다.
“인혜가 도인호씨를 많이 안타까워했어요. 정말 좋은 사람인데 사람들은 왜 보석을 몰라볼까 하고요. 그때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강산은 삼척항 근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소지에 적힌 집을 찾아갔다. 이마에 땀을 쏟으며 언덕을 올라가자 낮은 담장 너머로 생경한 풍경이 펼쳐졌다. 누가 봐도 익숙지 않은 손길로 생선을 다듬고 있는 서인혜였다.
“서인혜씨?”
서인혜는 멍한 눈으로 강산을 올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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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은 서인혜가 타준 커피를 마시며 낡은 쪽마루에 앉았다. 한동안 경계하는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던 서인혜는 날선 눈을 거두고 강산의 옆에 앉았다. 나란히 앉아 바다와 하늘이 만나는 수평선을 바라보자 모든 시름이 풀리는 듯했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자 그녀는 달게 바다내음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잘도 찾아오셨네요.”
그녀의 말투와 눈빛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강산이 아버지의 지시로 자신을 찾으러 왔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담담하게 강산을 대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런데 서인혜씨야말로 어떻게 여기까지 온 겁니까?”
서인혜는 고개를 돌려 빤히 강산을 보았다. 강산을 믿어도 될지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강산의 인간적인 눈빛을 그녀는 고스란히 읽어냈다.
“수사하는 분이라 눈치 채셨겠지만 아버지와 전 사이가 별로에요. 전 그냥 제 삶을 살고 싶은데 아버진 절 자신의 삶에 끼어 넣으려 하죠.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이런 황당한 연극까지, 훗.”
“이해합니다. 서인혜씨만의 사정이 있었겠죠. 그런데 도인호씨는 어디 가셨나요?”
“이제 곧 돌아올 거예요. 후훗, 대단하시네요. 그렇게 도망치려 발버둥쳤는데 인호씨 이름까지 알아내다니.”
강산은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가출에 더 방점을 뒀습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납치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서 확인과정을 거쳤습니다. 물론 도인호씨가 남기고 간 낚시의자가 큰 도움이 됐고요.”
강산의 설명에 서인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단하시네요.”
“도인호씨가 화장실 창을 통해 낚시의자를 넘겨주고 서인혜씨는 그걸 이용해 창을 넘어가고, 끈이 끊어지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증거를 남겼지만, 어쨌든 탈출은 성공하셨네요. 납치를 가장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요구했던 3억을 복지재단에 넘긴 건, 기왕이면 좋은 일에 쓰자는 생각이었겠죠?”
”호호, 그것까지.”
그때 도인호가 담장 안으로 들어섰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깊은 눈을 가진 단단한 느낌의 남자였다. 강산을 보자마자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그를 향해 강산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반갑습니다. 안강산이라고 합니다.”
“도인호입니다.”
서인혜는 도인호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도인호는 무언의 눈빛으로 서인혜에게 괜찮냐는 질문을 던졌다.
“걱정 마. 아빠랑은 다른 사람 같아. 그나저나 인호씨, 손님 대접할 생선 좀 잡아왔어? 우리 얘기 전부 해드리려면 밤이 아주 길 것 같은데? 하하.”
강산은 밤이 깊도록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음날 시원한 곰치국까지 대접을 받은 후 자신의 차에 올랐다. 상경하는 차 안에는 강산 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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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강산이 사무실에 들어서자 미나와 태상이 함께 있었다.
“태상이 넌 웬일이냐?”
“궁금해서 왔죠. 어떻게 되었어요? 서인혜씨 찾았어요?”
“그럼, 당연하지. 후후.”
강산은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몸을 기댔다.
“서인혜씨는 집으로 돌려보냈어요? 조력자는요?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후후, 아무도 돌아가지 않았어. 그냥 두 사람 잘 살고 있다는 영상만 서상도 의원한테 보여줬지.”
“네?!”
태상과 미나는 어이가 없는 듯 서로를 바라봤다.
“알만 한 사람은 알겠지만 서상도 의원 무서운 사람이잖아.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인물이지.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서의원의 딸 서인혜씨고, 그래서 도망갔던 거야. 자신과 도인호를 지키기 위해서.”
“허억, 서상도 의원 그 정도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아버지라고 서인혜씨가 전부 털어놓진 않았지만 뭔가 사건이 더 있었던 것 같아. 그러니 두 사람을 서의원 앞에 데려갈 수는 없지. 물론 주소지도 못 넘기고.”
“탐정님, 괜찮겠어요? 화살이 탐정님에게 향할 수도 있잖아요.”
미나의 말에 태상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
“그럼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탐정님 옆에 있다가 우리까지 싹 다?”
“걱정 마. 내가 누구냐? 나 탐정 안강산이야. 그 정도 대비도 안 했을 것 같아? 크크.”
강산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뭔데요? 빨리 말해 봐요.”
웃음을 멈춘 강산은 어깨를 들썩이며 마치 연극을 하듯 답했다.
“내가 서의원을 만나서 뭐라고 했냐면, 따님인 서인혜씨는 납치된 것도 아니고 이미 성인이니 부모님을 언제 찾아뵐지는 스스로 결정할 것입니다. 단, 의원님과 저는 계약 관계가 있으니 따님이 잘 지내는지 궁금하면 저에게 말씀하십시오. 언제라도 따님의 영상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랬지. 크크.”
미나와 태상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강산도 오랜만에 속시원하게 웃어 제쳤다.
“그나저나 너희 참돔 매운탕 먹어봤냐? 도인호씨가 어제 갓 잡은 엄청난 녀석을 진공포장으로 싸줬는데 참돔에 소주 한 잔 할까?”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품에 든 세 사람은 손님 없기로 유명한 단골 술집을 향해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 본 작품은 유튜브 소리나는 책방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youtu.be/YxWGbEiGgW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