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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민에게는 최근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고층의 새 아파트로 이사 온 후부터 생긴 취미였다.
‘오늘은 나의 천사가 무엇을 하려나?’
그는 창가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망원경을 꺼내었다.
‘오늘은 기분이 안 좋은가? 창가에 앉아 한숨만 쉬고 있네?’
재민은 거의 매일 밤 건너편 아파트의 한 여자를 관찰했다. 가끔 커튼이 쳐진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그녀를 관찰했고 그의 새로운 취미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어느 정도 그녀의 생활패턴이 파악되고 관찰의 시간이 길어지자 마치 함께 하는 연인처럼 그녀의 감정에 따라 재민의 기분도 바뀌었다.
‘꽃이라도 보낼까?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 꽃을 보내면 놀랄지도 몰라.’
그녀가 우울해 보이는 날이면 어떻게든 그녀를 위로하고 싶었지만 재민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고민하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동네 공원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 그는 꿈꿔왔던 상황에 설레면서도 긴장감이 가시질 않았다.
‘아...지금이 절호의 기회인데...’
그녀의 주변을 배회하며 기회를 노렸지만 좀처럼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격투기 선수면 뭐 하냐, 여자 앞에서는 말 한마디 못하면서.”
재민의 동료이자 친한 친구인 동수가 그에게 자주했던 말이다. 남자들과는 상대가 누구라도 거침없이 붙는 재민이었지만 여자들 앞에만 서면 얼음처럼 굳어버리기 일쑤였다. 재민이 한참을 쭈뼛거리며 주위를 맴돌자 벤치에 앉아있던 그녀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 채고 그를 힐끔거렸다.
“저기...저 같은 아파트에 사는…”
그녀에게 다가간 재민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꺼냈다. 다행히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 없이 그를 대했다.
“그러세요? 어디선가 본 것도 같네요.”
그녀의 상냥한 말투에 안도하며 재민은 은근슬쩍 벤치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옆에 앉은 재민을 아랑곳 않고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안색이…”
재민은 망원경으로 봤던 그녀를 떠올리며 걱정스런 말투로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말끝을 얼버무리던 그녀의 맑은 눈에서 갑자기 후두둑,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아, 나의 천사.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거야.’
재민은 갑작스런 그녀의 눈물에 어쩔 줄 몰라 허둥대며 황급히 손수건을 건넸고, 그것을 받아든 그녀는 눈물 가득한 얼굴을 붉히며 총총히 사라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다음 날 밤, 경기가 끝나고 집에 돌아온 재민은 어김없이 그녀의 집을 살피기 시작했다. 며칠 째 같은 자리에 멍하니 앉아있는 그녀를 보자 그의 근심은 커져갔고 마음은 조급해졌다.
‘밥도 안 먹는 것 같은데, 저러다 큰 일 나겠어.’
그녀와 함께 속앓이를 하던 재민은 고민 끝에 손수 스프를 만들어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누구세요? 아, 손수건...!”
놀란 눈으로 재민과 스프 냄비를 번갈아 보던 그녀는 곧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스프를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스프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온 재민은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 행복에 젖었다.
‘감사는 내가 감사하지. 나의 천사!’
며칠 후, 아파트 단지에서 우연히 그녀를 만난 재민은 그녀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았다. 수줍게 얼굴을 붉힌 그녀는 손수건과 스프에 대한 답례라고 했다.
‘뭘 입고 가지? 양복? 청바지?’
들뜬 기분에 한참을 고민하던 재민은 세미 정장에 향수까지 뿌리고 한아름 프리지아 꽃다발을 든 채 그녀의 집에 들어섰다.
“와, 스파게티에 스테이크까지. 다 제가 좋아하는 요리네요.”
분위기 있게 꾸며진 식탁에서 그녀와 마주앉은 재민은 그녀가 준비한 와인을 함께 마시며 저녁식사를 했고 분위기는 제법 자연스럽게 흘렀다. 하지만 와인 한 병을 다 비우고 두 번째 와인이 시작됐을 때쯤 그녀의 맑은 눈에선 또다시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지온씨,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그의 천사, 그녀의 이름은 지온이었다. 재민의 계속된 질문에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는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예전부터 스토킹 하는 사람이 있어요. 얼마 전부턴 회사까지 찾아와서 난동을 부리는데...내일 밤에도 안 만나주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이런 미친 자식을 봤나?”
재민은 잔뜩 흥분을 하며 그녀를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런 놈들 제압하는 건 일도 아닙니다. 장소만 알려주세요.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정말, 그래줄 수 있어요?”
어둡던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아, 행복하다. 나의 천사를 위해 할 일이 있으니!’
다음 날 재민은 그녀와 함께 한강 공원으로 갔다. 늦은 밤이라 인적도 드문 공원에는 불량기를 잔뜩 풍기는 한 사내가 서성이고 있었다.
“뭐야? 남자를 달고 나왔네?”
팔뚝 가득 문신을 한 사내는 험상궂은 얼굴을 비틀어 이죽거리며 말했다.
“당신 뭡니까? 왜 지온 씨를 괴롭힙니까?”
“이 놈은 뭔데 나서? 우리 둘이 해결할 일이니까, 넌 꺼져!”
“연약한 여자를 괴롭히고, 당신이나 좋게 말로 할 때 가시지!”
“아, 이 자식이 자꾸 나서서 가라, 말라야, 확! 야, 도지온. 너 잠깐 나 좀 보자.”
사내는 갑자기 그녀의 팔목을 비틀어 잡고 끌고 가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보자 핑, 눈이 돌아간 재민은 그를 막아섰고 곧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제법 싸움을 해본 듯한 사내가 칼까지 꺼내들며 재민에게 달려들었지만 현역 격투기 선수인 재민에게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 여자 앞에 또 얼씬댔다간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웃기고 있네, 그런다고 내가 물러날 것 같아? 저 여자가 어떤 여잔지도 모르면서, 너나 정신 차려! 저 여자는.....”
만신창이가 된 채 바닥에 널브러진 사내가 분에 못 이겨 거칠게 소리치는 순간, 갑자기 지온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죽엇!”
지온은 바닥에 버려졌던 그의 칼을 정확히, 사내의 목에 찔러 넣었다. 사내는 억 소리도 못 내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바들바들 떠는 지온의 손에서 툭, 칼이 떨어졌다.
“지, 지온씨!”
놀란 재민이 사내와 지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 너무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그만…”
사색이 된 지온은 손수건을 꺼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집어 올렸다.
“저, 자수할 거예요. 이, 이것 좀.....”
그녀는 칼을 재민에게 건네며 전화기를 꺼내들었다. 당황한 재민은 어쩔줄 몰라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 지온씨, 잠깐만요. 꼭 자수 해야겠어요?”
“이렇게는 못 살아요. 죄 값은 받아야죠.”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그녀에게서 그동안 사내에게 당했을 처절한 고통이 묻어났다. 재민은 그녀의 그런 모습에 연민이 밀려왔고 어떻게든 그녀를 돕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것 또한 원치 않았다.
“어서 피하세요, 괜히 재민씨까지 피해주긴 싫어요.”
함께 하겠다는 재민의 말을 한사코 거절한 그녀는 혼자 남겠다며 그를 돌려보냈다.
“재민씨, 격투기 선수인 걸 경찰이 알면 괜한 오해를 할 거예요. 그리고...저...끌려가는 모습 재민씨한테 보여주기 싫어요. 흐으흑.”
그녀의 간곡한 요구에 터덜터덜 공원을 돌아 나오는 재민의 시야 멀리,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며 출동한 경찰차가 보였다. 재민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어둠속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았다.
“사람이 죽었어요.”
시신을 가리키며 온몸을 들썩여 흐느끼는 그녀가 보였다. 경찰 두 명이 시신을 살피는 사이 그녀에게 다가간 또 다른 경찰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멀리서 그녀가 재민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 순간, 세 명의 경찰관이 빠르게 재민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꼼짝 마!!!”
주춤하던 그가 어둠속에서 뒷걸음치며 자리를 벗어나려는데, 어느새 달려온 경찰 셋이 재민에게 총을 겨누었다.
“널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당황한 채 선 재민을 빠르게 제압한 경찰은 그의 손에서 칼을 빼앗으며 순식간에 수갑을 채웠다.
“왜, 왜이러십니까?”
“당신을 살인죄로 체포합니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아, 그건...제가 아니고 지온씨가...스토킹을 당해서...”
“시끄러, 자식아!”
경찰차 안에서도, 경찰서에서도, 칼을 가진 채 현장에서 체포된 재민의 말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지온의 증언까지 더해져 재민은 손써볼 겨를도 없이 10년 형의 실형을 받았다.
“칼하고 손수건에 당신 지문이 나왔어. 그리고 죽은 김동철 몸에도 당신 DNA가 다량으로 나왔고. 덮어씌울 걸 씌워! 힘없는 여자한테.”
“정말 아니라고요! 전 지온씨를 도우려 간 것뿐이라고요! 지온씨 좀 만나게 해주세요!”
“시끄러워, 그 천사 같은 여자한테 죄를 덮어씌우고. 어이구, 이 치졸한 자식아!”
재민이 실형을 받던 날, 그를 현행범으로 체포한 경찰은 지온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천사, 이제 걱정 마. 그 악마 같은 놈은 감옥으로 보냈으니까. 내가 우리 지온이 지켜줄게, 오늘 집에서 만날까?”
경찰은 꿈에 그리던, 천사 같은 여자를 만난 기쁨에 젖어 행복감에 도취되었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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