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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유쾌한 대화를 하며 저녁식사를 하던 진석은 준비해 온 반지를 내밀며 나영에게 청혼을 했다.
“정말 나랑 결혼할 수 있겠어?”
달달하던 분위기를 깨고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하는 나영을 보며 진석은 적잖이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우리 사랑하잖아.”
“그치, 근데 그 사랑이란 걸로 내 모든 걸 감당할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나만 믿어.”
예쁘장한 외모에 사랑스럽기만 하던 나영이 갑작스레 뾰족해져 하는 말이 진석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결혼 전에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여자들이 있다는 선배들의 귀띔을 떠올리며 자신이 더욱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난 지 석 달 만에 청혼을 하고 결혼을 서두르는 것에 나영이 부담을 느끼는 것도 한편으론 당연할 수도 있었다.
“부모님한테는 언제 인사드리러 가지?”
나영에게 청혼을 하고 얼마 후, 진석은 조심스레 나영에게 물었다.
“나 가족 없어. 초등학교 때 모두 돌아가셨어. 그것도 모르면서 나랑 결혼하자는 거야?”
그동안 나영의 가족에 대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어서 까맣게 모르고 있던 진석은 나영의 상처를 건드린 것만 같아 허둥대며 나영을 달랬다.
“미안, 나영아. 내가 그것도 모르고...부모님 몫까지 내가 더 잘 할게, 걱정 마.”
“걱정 같은 거 안 해.”
며칠 뒤 진석은 자신의 부모에게 나영을 소개시킨 후, 나영의 부모님이 모셔진 납골당에 함께 인사를 가자고 제안했다.
“정말, 거기를 가자고?”
나영은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한 일그러진 얼굴로 진석에게 물었다.
“그럼, 아무리 돌아가셨어도 사위된 입장에서 인사는 드려야지.”
내키지 않아하는 나영을 보며 상처가 깊구나, 생각한 진석은 좀 더 듬직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 고집스레 나영을 설득했다.
“어쩔 수 없네.”
그 주 주말, 나영은 충주에 위치한 암자로 진석을 데려갔다.
“저기야, 그 분들 계시는 곳.”
나영은 별 감정 없이 암자 뒤, 후미진 풀숲에 늘어선 납골묘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진석은 풀이 무성한 납골묘 앞에서 절을 하고 준비해 간 국화를 올렸다.
“소중한 따님, 제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만들겠습니다.”
진지하게 절을 올리는 진석을 뒤에서 바라보던 나영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한 달 뒤, 두 사람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결혼식을 올렸고 신혼여행을 떠났다.
“근데, 우리 부모님 어떻게 돌아가셨는지 얘기해 줄까?”
신혼여행 첫날 밤, 호텔 룸에서 와인을 마시던 중, 나영이 갑작스레 부모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떻게 돌아가셨는데?”
분위기에 맞지 않는 껄끄러운 이야기에 당황스러웠지만 한번쯤 풀어야 할 이야기라는 생각에 진석은 진지하게 나영을 대했다.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불을 질렀어.”
“불을? 왜? 누가?”
진석은 굳은 얼굴로 들고 있던 와인잔을 내려 놓았다.
“글쎄, 누가...왜 그랬을까?”
“글쎄...라니? 범인을 못 잡은 거야?”
아무런 동요 없이 부모님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나영의 태도와 말투에 진석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 부모란 사람들...워낙 동네 사람들한테 못된 짓을 많이 해서, 누가 그랬어도 이상하지 않아.”
“뭐라고...?”
“그런 게 있어. 특히 엄마는 뒷말을 많이 했거든. 예를 들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열두 살이었을 때, 나를 보며 쟤는 일고의 가치도 없이 포기한 인생이라고 자기 친구들에게 떠벌리고 다녔거든.”
“무슨 포기?”
“언니들은 명문대에 갈 성적인데 나는 싹수가 없다나, 대대로 명문대만 가던 집안에서 나는 부끄러운 존재니까. 그 후로 엄마는 나를 없는 사람 취급했어. 가망 없는 자식은 쓸모가 없으니 어쩌면 당연한 거지. 내가 집을 나가 버리거나, 사고로 죽기를 바랐을 거야. 후후, 근데 그 잘난 엄마와 아빠, 쌍둥이 언니들은 모두 불에 타 죽고 나만 살아남았네. 어이없지?”
진석은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나영을 보며 안타까운 마음에 한숨이 나왔다.
“우리 자기, 많이 힘들었겠구나.”
“아니, 엄마가 더 힘들었겠지.”
3년 후, 진석과 나영의 결혼생활은 어느새 지루해지기 시작했고 집에서 살림만 하던 나영은 술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혼 2년 차에 겪은 유산 경험이 그녀를 알코올 중독으로 이끌었다. 진석이 여러 번 그녀를 설득해 알코올 중독 치료병원에 보냈지만 그녀는 번번이 탈출했다. 집에 들어오면 소주병만 나뒹구는 일상에 지친 진석은 결국, 더 이상 결혼생활을 이어갈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엄마, 저 이혼해야 할 것 같아요.”
진석은 그날도 술에 곯아떨어져 소파에서 잠든 나영을 보고 안방에 들어가 통화를 했다.
“이 여자, 완전히 포기했어요. 구제불능이에요.”
인기척에 설핏 잠에서 깬 나영은 안방에서 들려오는 진석의 목소리에 방을 향해 다가갔다. 문 밖에 귀를 대고 통화를 엿듣는 나영을 눈치 채지 못한 진석은 그동안의 불만을 토로했다.
일주일 후, 진석의 아파트는 가스 폭발 사고로 전소되었다. 혼자 집에 있던 진석은 새까맣게 불타 검은 뼈만 남았고, 술을 사러 마트에 갔던 나영은 가까스로 화를 면했다. 진석을 떠나보낸 그녀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얼마 후, 그의 무덤 앞에 가서 중얼거렸다.
“그래도 넌 다를 줄 알았는데...결국 우리 엄마처럼 날 포기하고 말았네. 크흐흐.”
미친 듯이 웃는 그녀의 두 눈에 시뻘겋게 불길이 일렁였다. 한 쪽 눈에는 그녀의 부모님이, 다른 한 쪽 눈에는 진석이 그녀의 눈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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