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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공포 소설

신약의 비밀

by 배작가 2021.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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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민은 병실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앞으로 담당하게 될 환자와의 첫 대면이 설레면서도 긴장되었다. 간호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학과 교수의 추천으로 대형 종합병원에 들어온 지 한 달, 그녀는 짧은 수습과정을 거쳐 특수병동으로 배치되었다. 특채로 들어온 것에 대해 주변에선 의심과 시기의 눈빛을 보내기도 했지만 경민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학부시절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공부에 전념한 본인의 노력이 약간의 운을 불러왔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전 유미에요. 간호사 선생님 예뻐서 엄청 좋아요.

  국내 유일의 희귀유전병 환자인 8살 유미는 우려와 달리 활기찬 모습으로 경민을 대했다. 아이들은 어른에 비해 병에 대한 인식이 약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미의 경우 태어난 후 줄곧 병원에서만 지냈는데도 이렇게 밝은 모습을 보이는 것에 경민은 적잖이 놀랐다. 환자복을 입고 무균실에 있지 않다면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것 없는 유미는 제가 그린 공룡 그림을 보여주며 쫑알쫑알, 쉴 새 없이 떠들었다. 경민은 꼭 같은 나이인 조카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오유미 환자는 특별 관리 대상이니까 각별히 신경 써. 그렇다고 너무 깊이 감정을 넣진 말고. 넌 관리 담당이니까 네 할 일만 해.

  경민은 인수인계를 하던 선임 간호사 선옥의 말을 떠올렸다. 선옥은 유미가 태어나 특수병동으로 옮겨왔을 때부터 줄곧 유미를 담당했던 간호사였다. 이곳, 유미가 있는 특수병동은 유미 혼자만을 위한 첨단 의료 장비가 구비되어 있고 특정된 몇몇 관계자만 드나들 수 있는 독립적인 곳이다. 어린 나이에 희귀병에 걸린 건 안됐지만 무료로 이런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유미는 한편으로 운이 좋은 것이라고 경민은 생각했다. 유미의 의료비는 익명의 한 재단에서 모두 지원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도 열 개 뽑아요?

  사흘에 한 번씩 오는 채혈 때마다 유미는 울상을 하며 경민에게 물었다. 평소 활발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잔뜩 겁먹은 얼굴로 채혈을 하면 유미는 꼬박 반나절을 기진맥진해 잠을 잤다. 수년 째 겪는 일인데도 유미의 두려움은 매번 새롭게 반복되었고 그럴 때마다 경민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완치될 희망도, 일상적인 생활에 대한 기대도 할 수 없는 유미의 상황이 경민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특수 병동이라 해도 경민이 하는 일은 간단했다. 아침, 저녁으로 체온, 혈압, 등의 기본 체크를 하고, 담당의가 처방한 약을 전달하고,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 검사 일정을 관리하고, 사흘에 한 번 채혈을 할 뿐이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처럼 긴박하거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일은 없었다. 경민이 유미의 담당으로 온 석 달 동안 유미는 몇 번의 미열과 설사가 있었을 뿐 대체로 평온한 일상이 지속되었다. 다른 병동과 달리 부모나 간병인의 상주도 허용되지 않아 가끔 면회 오는 유미 엄마와 아빠를 제외하곤 투명 유리막 안에 있는 유미를 그저 지켜보면 될 뿐이다. 유미도 그런 생활에 익숙한지 혼자 그림을 그리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끔 투명 유리막을 두드리며 경민에게 지루하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접촉을 최소화해야 하는 유미에게 경민이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곧 경민도 이런 일상에 익숙해졌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날도 경민은 일상적인 체크를 마치고 담당의사의 회진에 간략히 유미의 상태 를 보고하고 있었다. 헌데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담당 의사가 서둘러 자리를 뜬 후 경민은 책상 위에 놓인 차트를 보게 되었다. 급히 가느라 담당의가 미처 못 챙긴 유미의 차트였다. 그때, 경민의 눈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차트 안에 빼곡히 적힌 유미의 혈액검사와 정기검사 결과들에 모두 Normal, 정상이라고 표기가 되어 있었다. 경민이 알고 있는 유미의 병증과 일치하지 않는 결과였다. 차트상의 수치에 의하면, 분명 유미는 완치가 된 것이다. 더 이상 무균실에 갇혀 지내지 않아도 되는, 정상의 유미가 되었다는 뜻이다. 놀라움과 기쁨에 들뜬 경민은 마치 제 일인 양 가슴이 설레었다. 담당 의사의 정식 지시가 곧 내려질 테지만 경민은 좀 더 빨리 유미에게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

  좀 있으면 유미, 학교에도 가고, 엄마아빠랑 놀이공원도 갈 수 있겠는걸.

  경민의 말에 유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환호를 질렀고 침대 위에서 폴짝폴짝 뛰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달라고 졸라댔다.

  아직 우리끼리 비밀이야. 엄마아빠한테는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실 거야.

  경민은 눈을 찡긋하며 유미를 다독였다. 유미도 더는 보채지 않았고 오후에 있던 채혈도 다른 때와 달리 씩씩하게 받았다. 그날 저녁, 유미의 엄마가 새 장난감을 사들고 면회를 왔다. 채혈이 있는 날이면 으레 있는 일이었다. 엄마를 보자마자 부서지듯 웃으며 품에 안긴 유미는 엄마의 귀에 대고 연실 뭔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색이 된 유미 엄마가 무균실 밖으로 뛰쳐나오며 소리쳤다.

  유미 말이 사실이에요? 우리 유미가 곧 퇴원을 한다고요?

  아이 참, 유미가 얘기를 했나보네요. 곧 담당 교수님이 말씀하실 거예요.

  유미 엄마는 경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병동을 뛰어나갔고 경민은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아픈 환자가 완치되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간호사로서 가장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경민은 유리막 안에서 손을 흔드는 유미를 바라보며 함께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날 밤, 경민은 담당의사와 병원 고위관계자들에게 둘러싸여 호된 질책을 받았다. 섣부른 행동으로 환자와 그 가족에게 혼란을 주고 상처를 남겼다는 이유에서였다. 숨 막히도록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경민은 묵묵히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차트에서 본 내용을 반문할 수도 없었다. 의사용 차트를 임의로 보거나 환자에게 그 경과를 알리는 것은 간호사인 경민의 업무를 벗어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후폭풍은 생각보다 거세어 3일 뒤 경민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업무정지 후 대기발령 상태가 되었다. 사실상 퇴사 종용, 압박의 의미였다.

  내가 차트를 잘못 본 건가?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경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줄곧 시기의 눈빛으로 바라보던 동료 간호사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매서운 눈초리로 경민을 경계했고 병원을 추천해 주었던 교수마저 경민에게 전화를 해 윽박지르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의 논란을 견디기 힘들었던 경민은 병원의 처분에 따라 순순히 퇴사를 결심했다. 인수인계 과정도 없이 급히 병원을 떠나게 된 경민은 자신의 짐을 챙기러 잠시 들른 병동에서 마지막으로 유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새 파리하게 마른 유미는 자그마한 얼굴 가득 울상을 지으며 채혈을 받고 있었다.

  ...........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유미에게 상처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경민은 죄책감에 휩싸인 채 눈물을 흘리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내가 유미를...더 아프게 만들었어. ...환자를 돌볼 가치도 없어.

  화장실 끝 칸에 들어가 흐느껴 울며 후회와 자책을 하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경민은 울음을 삼키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때,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경민의 귀에 꽂혔다.

  여보, 일은 잘 해결됐어. 박사님이 더 신경 써 주신다고 했으니까 걱정 마.

  활기차고 날카로운 고음, 그건 분명 유미 엄마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드디어 신약이 중국시장을 뚫었데, 거대한 중국시장을 말이야.

  신약? 유미를 고칠 신약이 개발 중인가? 제발 잘 됐으면...

  경민은 눈물을 닦고 얼굴을 추스르며 유미 엄마에게 사과를 해야 할지 어쩔지 고민했다. 자신의 섣부른 행동으로 가족들도 헛된 희망을 품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여보, 앞으로 채혈은 매일 진행될 거야. 그럼 돈도 세 배로 늘어나는 거지? 호호.

  유미 엄마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경민은 순간, 혼란에 빠졌다.

  채혈이 세 배로 늘고...돈이 세 배가 된다고? 뭐야, 설마 유미 얘기야?

  경민은 숨을 웅크린 채 계속 통화소리를 엿들었다.

  그 얼뜨기 간호사가 일을 다 망쳐버리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병원에서 잘 처리했더라고. 어디서 굴러온 게 우리 복덩이 유미를 퇴원시키려고, .

  경민은 비명이 터지려는 자신의 입을 겨우 틀어막았다. 도저히 믿을 수도, 믿기도 싫은 이야기였지만 그제야 자신에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납득되었다.

  차트에서 유미는 분명 정상이었어...그렇다면 혹시 유미 혈액을 이용해서 신약을?

  경민은 뭔가 유미를 둘러싼 음모가 있음을 알아채고 재빨리 핸드폰을 켜 소리를 녹음하기 시작했다.

  이따 재단 측하고 재계약 있으니까 준비해 놓고. 그리고..., 여보, 잠깐, 내가 다시 전화할게.

  갑자기 통화를 끊은 유미 엄마는 이내 화장실을 나가버렸다. 미친 듯이 고동치는 가슴을 가라앉히며 한동안 변기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경민은 한참이 지나서야 화장실을 나왔고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왔다.

  다음날 아침, 지방의 한적한 저수지에서 젊은 여성의 시신이 떠올랐다. 의료사고를 일으켜 병원에서 징계를 받은 신참 간호사가 신변을 비관해 자살한 사건으로 발표되었고 아무런 의혹 없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카페에 앉아 핸드폰으로 뉴스를 보던 경민의 선임 간호사, 선옥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으이그, 끝까지 모른 척을 했어야지. 누군 몰라서 입 다문 줄 알아. 나도 이제라도 빠져 나왔으니 다행이지, 여차했다간...휴우...

  차가운 커피를 쭈욱 빨아들인 선옥은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우산을 펼쳐들고 추적추적 비 오는 거리에 발을 내딛자마자 그녀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우산에 파묻힌 그녀 뒤로 매서운 눈초리의 남자 둘이 서서히 다가갔다. 어느새 거세진 빗줄기 속에서 툭, 그녀의 우산이 바닥에 나뒹굴고 검은 승합차 한 대가 비안개 사이로 무섭게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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