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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지하도에 내려가지 않았어야 했다. 술에 취해 지하도에 내려갔어도 그 이상한 노인과 말을 섞지 말았어야 했다.
“올 한 해 동안, 절대 제사음식은 먹지 마! 안 그러면 큰 화가 생길거야.”
술김에 재미 삼아 사주팔자를 보는 할아버지 앞에 앉자마자 노인은 그에게 호령하듯 말했다.
“에이 설마요.”
“설마가 사람 잡는 거 몰라? 설마 하다가 훅 가는 수가 있어. 명심해! 괜히 날 원망하지 말고!”
당시 그는 그 얘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기분이 찜찜해졌다. 큰 댁 제사에는 안 가면 그만이지만 장례식이 문제였다. 누군가 안 죽길 바라는 수밖에 없지만 세상사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뭐? 성준이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고?”
친구 녀석의 전화를 받고 그는 깜짝 놀랐다. 이제 갓 60을 넘긴 성준의 아버지가 갑작스레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안 갈 수도 없고...휴우, 난감하네.’
그는 어쩔 수 없이 친구 아버지의 장례식으로 향했고 향을 피우고 상주와 인사를 한 뒤 이미 자리를 잡은 친구들과 마주했다.
“경호, 오래간만이다. 술 한 잔 해라.”
다른 장례식과 다를 바 없이 가족들은 슬픔에 잠겨있고, 갑작스레 친목모임을 갖게 된 사람들은 저마다의 술자리를 이어갔다.
“넌 왜 아무것도 안 먹어? 술이라도 한 잔 해.”
자꾸 재촉하는 친구들 때문에 그는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만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게.”
“얌마, 새벽에 무슨 일이 있어? 이 자식 이상하네,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 술 한 잔도 안 마시고.”
그는 은근슬쩍 꽁무니를 빼고 일어났다. 사실대로 얘기하자니 친구들의 비웃음을 살 것 같고, 그렇다고 찜찜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그 후로도 더러 장례식이 있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자리를 피하며 노인이 말한 위기를 모면했다. 어느덧 한 해가 저물어 연말이 다가왔다.
“올해도 새해맞이는 지리산에서 보내야지?”
연말이면 항상 함께 산을 타던 친구 준호에게 연락이 왔다.
“그럼, 당연하지. 새해맞이 산행인데 놓칠 수 없지.”
그는 아무 탈 없이 한 해를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한결 기분이 가벼워졌다. 드디어 회사 종무식을 마치고 그는 친구와 함께 지리산에 올랐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왜 이렇게 힘드냐.”
“눈까지 오니까 만만치 않네. 산장에서 하루 더 묵고 올 걸 그랬나?”
갑자기 악화된 기상상황에도 정상에서 해맞이를 하려는 욕심에 그들은 무리하게 산행에 올랐다.
“눈이 너무 많이 오는데…”
그들은 눈 쌓인 산등성이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근심에 휩싸였다. 그 순간, 준호의 비명이 산새를 울렸다.
“무슨 일이야, 준호야?”
주변을 살피던 준호가 눈 쌓인 바위를 밟고 미끄러져 속절없이 밑으로 추락했다.
“아아악!”
손 써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일이 벌어졌다. 이미 준호는 시야에서 사라졌고 웬일인지 핸드폰까지 먹통이었다. 추락한 지점을 향해 아무리 소리쳐 불러 봐도 준호는 대답도 없었다.
‘이 녀석 어떻게 된 거야, 해가 지면 더 위험할 텐데.’
해가 지기 전 준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조심조심 밑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바닥을 분간할 수 없이 눈이 쌓인 데다 눈발까지 흩날려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다. 얼마 못 가 그마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고 거친 산길을 따라 정신없이 추락했다.
“이봐요…”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뜬 곳은 작은 황토방이었다.
“정신이 들어요?”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이 그의 귀에 스며들었다.
“여기가…어디에요?”
“꼬박 하루나 정신을 못 차리셨어요.”
“하루를…그럼 오늘이 몇 일이예요?”
“올 해의 마지막 날, 31일이요.”
그녀의 말에 그는 뻐근한 몸을 움직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아직은 무리에요. 여기, 따뜻한 차 좀 드세요. 기력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거에요.”
“아, 감사합니다. 근데 혹시 저 말고 제 친구, 다른 사람은 못 봤나요?”
“글쎄요. 너무 어두워서...”
그는 친구에 대한 걱정이 들자 마음이 급해졌다.
“그럼, 좀 더 쉬세요.”
그녀가 나간 뒤 그는 그녀가 놓고 간 차를 마셨고 그제야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이 산중에 여자 혼자...이런 곳에서 지내다니.’
정신이 든 그가 주섬주섬 겉옷을 입으며 가방을 챙기는데 다시 방안으로 들어온 여자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차 감사합니다. 덕분에 기운이 나네요.”
기력이 회복된 그는 한시라도 빨리 준호를 찾고 싶어 나갈 채비를 했다.
“지금은 눈이 많이 쌓여 있어 위험해요. 내일 날이 밝은 뒤에 움직이셔도 늦지 않아요.”
“그래도...”
“저녁 준비 다 되었어요. 제가 금방 저녁을 올릴 테니 더 기력을 차린 후에 일어나세요. 괜히 무리해서 나갔다간 두 분 다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그는 졸지에 낯모르는 여자와 하루를 보내게 된 것이 난감했지만 여자의 말대로 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그녀가 차려온 저녁을 먹고 그는 바로 잠에 빠져들었다.
“아…답답해!”
새벽녘, 그는 온 몸이 갇힌 듯 답답한 기분이 들어 잠이 깼다.
“왜 이러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해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만 동그랗게 뜬 채 주변을 살필 뿐 손가락 하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왜, 무슨 문제 있나? 우리 귀한 제물께서?”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그가 눈을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니 어둠속에서 정좌를 하고 앉은 그녀가 보였다. 하얀 한복을 차려입고 곱게 단장까지 마친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녀의 길에 들어선 지 10년, 아무리 치성을 드려도 효험이 없었는데, 네 덕분에 신령님께 산 제물을 바칠 수 있게 되었으니 드디어 탁월한 능력을 점지 받겠구나. 눈밭에서 널 발견한 건 정말 행운이지 뭐야.”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네가 아까 먹은 저녁, 우리 신령님 제사상에서 내온 거야. 그걸 먹고 몸이 회복되었다는 건 신령님도 널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거지. 이제 네 몸도 회복되었으니 신성한 제사상에 올릴 준비가 되었네.”
여자는 그를 멍석에 만 채 질질 끌고 황토방 옆의 동굴로 들어갔다. 제단이 마련된 동굴 안에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있었고 한쪽 끝에는 멍석에 말린 준호가 이미 썩어가고 있었다.
“저 녀석은 괜히 끌고 왔어. 이렇게 죽어버릴 줄 알았으면 버려두고 올 걸, 괜히 힘만 들였지 뭐야.”
그녀는 그를 제단에 눕힌 채 커다란 칼을 휘두르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신령님께 드디어 산 제물을 바칩니다. 부디 어여삐 보시어 제게 많은 권능을 주시길 기원하나이다.”
춤을 추는 그녀의 뒤로, 제단 벽면에 신령님의 초상화가 붙어있다.
‘저, 저건...그 노인?’
초상화 속 신령님의 얼굴은 분명 지하도에서 본 노인이었다. 초상화 속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안타깝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아랑곳 않고 여자는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춤을 추다가 갑자기 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그의 괴성에 그녀는 더욱 신명나게 춤을 추며 그의 온 몸을 칼로 베었다. 뿜어져 나오는 그의 피에 동굴 속 제단 위는 어느새 피로 물들었다. 한 줌 남은 그의 의식에 노인이 했던 말이 희마하게 떠올랐다.
“절대 제사 음식은 먹지 마…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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