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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밀어주시겠어요?”
눈이 맑은 아이가 힘겹게 휠체어를 밀며 주희에게 다가왔다.
“너 혼자 있는 거니?”
“네, 답답해서 혼자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야 하는데 길을 잃었어요. 팔에 힘도 빠졌고요.”
주희는 도움을 청하는 아이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집이 어딘데?”
“저기 언덕 위에 있는 집인데, 방향을 잘 못 찾겠어요.”
주희는 휠체어 옆에 앉아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아, 저기. 내가 길을 알아. 걱정 마, 데려다줄게.”
주희는 얼마 전까지 그 마을에 과외 수업을 다녔기 때문에 길을 잘 알았다. 부촌이 형성된 마을로, 대학생인 그녀로서는 꽤 넉넉한 수업료를 받으며 과외를 했었고 사람들 매너도 좋았다. 주희는 기꺼이 휠체어 뒤로 돌아가서 소년을 밀었다.
“고맙습니다.”
‘흠, 역시 요즘에는 있는 집 애들이 더 예의바르다니까.’
주희는 마음속으로 소년을 칭찬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누나는 어디 살아요?”
“나? 나는 영천동.”
“영천동? 엄마가 거기는 거지들만 사는 곳이라고 했는데.”
소년의 거리낌 없는 말에 주희는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그렇지는 않아. 단지 가난할 뿐이지, 남한테 구걸하는 거지들이 사는 곳은 아니란다.”
교육학을 전공하는 주희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며 친절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아이가 이렇게 생각하는 건 부모의 잘못된 교육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왜 가난해요?”
꼬치꼬치 캐묻는 소년을 보며 주희는 골치 아픈 녀석을 상대하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게을러서겠죠.”
주희의 말을 툭, 끊은 소년은 단정적인 말투로 얘기했다. 아마 이 얘기도 엄마한테 들었을 거라 생각한 주희는 더는 녀석과 말을 섞을 필요가 없겠다고 느꼈다.
“어디쯤이니?”
주희는 언덕으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다. 어느새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저기 빨간 지붕이요.”
소년이 가리킨 집은 그녀가 과외 수업을 했던 집보다도 훨씬 컸다. 높다란 담벼락 너머로 거대한 나무들이 치솟아 있고 웅장한 저택의 빨간 지붕이 빼곡한 나무 사이로 보였다.
“엄청나구나, 너희 집.”
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툭,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네, 게으르지는 않거든요.”
‘어휴, 진짜 요놈이.’
주희는 꿀밤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아이를 빨간 지붕의 집 앞까지 데려갔다.
“이제 다 왔으니까 혼자 들어갈 수 있지? 난 이만 가볼게.”
돌아서는 그녀의 팔목을 소년의 연약한 손이 붙잡았다.
“이렇게 고생하며 도와줬는데, 그냥 보내면 전 나쁜 아이가 되잖아요.”
소년이 맑은 눈을 굴리며 공손히 말하자 좀 전의 얄미운 말로 상했던 마음이 녹아 내렸다.
“엄마가 그러는데 도움을 받았으면 꼭 보답을 해야 한다고 했어요.”
소년의 보답이란 말에 그녀는 못 이기는 척, 아이의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거대한 저택을 구경할 기회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음, 정원에 꽃이 많구나.”
“엄마가 꽃을 좋아하시거든요. 큭큭.”
갑작스런 소년의 웃음에 주희는 꽃을 바라보며 무심코 물었다.
“왜? 뭐가 그렇게 재밌니?”
“엄마가 꽃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걸 꺾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웃었어요.”
그게 웃을 일인가 생각하며 주희는 아름답게 꾸며진 정원에 넋을 잃었다.
“엄마는 좋은 걸 보면 늘 자기 옆에 두고 싶어 하거든요. 아마 누나도 좋아할 것 같아요. 예쁘잖아요.”
“음…그래?”
어린 아이의 말인데도 주희는 우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머, 고마워요. 우리 영호를 이렇게 데려다주시고.”
소년의 어머니는 대단한 미인인데다 치장도 화려했다. 온갖 장신구에 홈드레스까지, 중세 귀족 시대로 돌아간 듯 착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가 길을 잃었다고 해서요.”
“호호, 그러 리가. 영호야, 너 길을 잃었니?”
“아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매일 다니는 길인데요.”
주희는 소년의 맹랑한 대답에 당황스러웠다.
“아무래도 주희씨가 마음에 들어서 데려왔나 보네요. 그렇지, 영호?”
“맞아요. 엄마도 좋아할 것 같아서요, 예쁜 거 좋아하시잖아요.”
주희는 그들의 대화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거짓말로 자신을 데려왔다는 사실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주희는 영호의 어머니가 내온 독특한 향의 차를 마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희 누나, 그냥 우리랑 같이 살면 안 돼요? 난 누나 좋은데.”
영호가 맑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누나도 가족이 있어서 그건 힘들어.”
“그래봤자. 가난뱅이 거지잖아요. 옛날 우리 부모처럼. 그렇죠, 엄마?”
“뭐…라고?”
당황한 주희가 영호 어머니를 쳐다보자 그녀는 소리 없이 미소만 지었다.
“아무튼 저는 이만…”
주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영호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냥 우리랑 함께 있지 그래요? 돌아가서 좋을 게 없잖아요.”
“아이 말은 참겠는데 어머님까지 이러시니까 불쾌하네요. 저 이만 가겠습니다.”
주희는 영호 어머니의 손을 뿌리쳤다.
“이래봤자 좋을 게 없는데, 말로 안 되면 꺾을 수밖에.”
“뭐라고요?”
당황한 주희가 서둘러 나가려는데 영호 어머니가 바깥을 향해 누군가를 불렀다.
“김실장!”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꼭 붙는 슈트를 입은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나타났다.
“네, 사모님!”
“여기 손님, 오늘부터 우리 가족이니까. 작업 준비해요.”
‘작업?’
주희는 그제야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을 깨닫고 문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슈트를 입은 사내의 거친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혔다.
“어딜 가려고!”
사내의 강한 완력에 저항도 못한 주희는 사냥개에게 잡힌 토끼처럼 질질, 지하실로 끌려갔다.
한 달 후, 저택 촌이 자리 잡은 언덕 밑 골목에 휠체어 한 대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
“제가, 혼자 갈 수가 없어서 그런데, 휠체어 좀 밀어주시겠어요?”
영호가 휠체어에 앉은 채, 지나가는 젊은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아, 그래. 집이 어딘데?”
“저기요.”
남자는 친절하게 영호의 휠체어를 밀고 언덕 위의 빨간 지붕 집으로 향했다.
‘형도 잠시 후면, 우리 엄마의 새 가족이 되겠구나. 나와 주희 누나처럼. 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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