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스테리 공포 소설

해리성 둔주

by 배작가 2021. 2. 20.

*소리나는 책방의 모든 작품은 창작입니다. 저작권 침해(불법복제, 배포등)시 법적처벌을 받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상혁 오빠? 상혁 오빠 맞지?”

그를 다시 만난 건 에메랄드 빛 바다가 보이는 한 카페에서였다. 제주도에 정착한 지 1년, 유진은 같은 직장 선배, 도연과의 만남을 위해 토요일 오전, 한 카페에 왔다.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유진이 커피를 마시며 바다를 보고 있는데 도연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 분은요, 언니?”

결혼을 앞둔 도연이 약혼자를 보여주겠다며 주말에 시간을 비워놓으라고 했을 때 유진은 망설였다. 몇 년간의 긴 고통의 시간을 끝내고 새 출발을 하려 제주도에 내려 온지 1년, 여러모로 불안정했던 유진을 살뜰히 챙기며 도와줬던 도연의 제안을 유진은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주말에 바람도 쐬고 해야지, 그리고 서진씨 주변에 괜찮은 친구들 많거든.”

반 강제적으로 약속을 정한 도연의 의도를 유진은 모르지 않았다. 제주도 토박이인 도연은 직장 외에는 집에만 처박혀 지내는 유진을 자주 밖으로 불러내 숨은 명소나 맛집을 데려가며 유진을 세상 밖으로 끌어내려 애썼다. 도연 덕분에 유진은 낯선 곳에서의 삶에 차츰 적응해갔고 조금씩 과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주차 중, 커피 한 잔 하고, 좋은 데 가서 점심 먹자.”

바다가 보이는 창가 자리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훤칠한 키에 준수하게 생긴 도연의 남자친구, 서진이 카페에 들어섰다. 낯선 이와의 만남이 익숙지 않은 유진이 어색한 듯 서진을 마주한 순간, 유진은 과거로 빨려들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상혁 오빠? 상혁 오빠 맞지?”

도연의 남자친구 서진을 바라보며 사색이 된 유진은 푸르르, 입술을 떨었다. 유진의 넋 나간 듯한 행동에 도연과 서진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음, 정말 닮긴 닮았네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유진이 내민 핸드폰 속 사진을 본 서진은 머리를 긁적이며 유진에게 말했다. 유진은 흐릿하게 얼굴만 확대된 사진을 바라보며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유진이 네가 말했던 예전 남자친구?”

사진을 본 도연 또한 꼭 닮은 두 사람의 모습에 놀라며 유진에게 말했다.

 

2년을 함께했던 남자친구 상혁이 3년 전, 갑작스레 사고를 당해 죽고 나서 유진은 오랜 시간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상혁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던 유진은 다니던 학교까지 휴학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안에 처박혀 시간을 보내다 1년 전, 이곳 제주도에 내려왔다. 그와의 추억이 없는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1년, 도연의 도움으로 제법 제주에서의 생활에 적응했고 과거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생각한 이때, 유진 앞에 상혁과 꼭 닮은 서진이 나타난 것이다. 서진은 도연과 마찬가지로 제주도 토박이였고 고등학교 때부터 서로 알고 지낸 사이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닌 기간을 제외하고 서진은 줄곧 제주에서 지냈다고 했다.

“죄송해요, 제가 괜히 이상한 소릴 해서...”

유진의 사과에 도연과 서진은 손 사레를 치며 웃어넘겼지만 그들과 같이 있는 내내 유진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 말투, 말할 때의 표정과 손짓, 걸음걸이 등, 얼굴뿐 아니라 습관까지 상혁과 꼭 닮은 서진을 보고 유진은 과거의 상혁과 마주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3년 전, 유진에게 상혁의 죽음을 알려온 사람은 그의 누나였다.

- 김상혁, 뇌출혈로 사망, 가족 외에 조문객은 받지 않겠습니다.

초라한 한 줄 메시지로 전달된 상혁의 죽음을 유진은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죽음을 통보받고 나서야 유진은 그의 주변 사람이나 가족사, 그의 신변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그의 죽음을 공유할 수도, 함께 아파할 수도, 장례식에 참석해 마지막을 함께 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유진은 온전히 혼자, 슬픔을 견디어야 했다. 집에 틀어박혀 기억을 떠올리고 떠올려 상혁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모두 헤집고 나서야 그가 바닷가에서 나고 자랐다는 기억을 간신히 찾아냈다. 유진을 제주도로 이끈 것은 과거를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거 상혁의 흔적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카페에서의 만남 이후, 유진은 도연과의 대화 도중 틈틈이 도연의 남자친구 서진에 대해 물었다.

“서진 오빠는 언제 제주도로 돌아왔어요?”

“음, 졸업하고 바로니까 한 3년 됐나? 대학 다닐 때는 서울에 정착할까 했는데 안 되겠더래, 바다 보며 자란 사람들은 바다를 못 잊거든.”

“그럼 언니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계속 사귀었던 거예요?”

“아니, 서진씨가 제주도로 돌아오고 나서 얼마 있다, 우리 둘 다 서핑에 미쳤거든, 서핑 하러 갔다가 우연히 다시 만났어. 옛날 서진씨 같았으면 내가 거들떠도 안 봤지, 걔 서울 갔다 와서 사람 됐어. 흐흐.”

유진은 죽은 남자친구 상혁이 함께 워터파크에 갔다가 무심코 흘린 말을 떠올렸다.

‘아, 서핑하고 싶다, 유진이 너도 배우면 좋을 텐데, 나중에 꼭 같이 하자.’

유진은 도연의 남자친구 서진이 자신의 죽은 남자친구 상혁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말 내내 집에 들어박혀 컴퓨터로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의심 사례를 검색하던 유진의 눈에 ‘해리성 둔주’라는 단어가 들어왔다.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전의 기억을 잃고 다른 장소에서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기억장애, 만약 서진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 이 증세와 꼭 들어맞았다.

“도연 언니, 상견례는 했어요?”

은근슬쩍 서진의 가족에 관해 묻는 유진의 질문에 도연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어, 아버님만 뵀어, 어머니는 돌아가셨거든,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누나도 있는데 결혼해서 서울 산대. 엄마처럼 엄청 깐깐하게 간섭한다고 벌써부터 걱정이야, 호호.”

“그렇구나, 어머니는 어쩌다가?”

“3년 전에 사고가 있었어, 서진씨 어머니가 운전하던 차가 급발진으로 등대에 부딪혀서 바다에 침수되는 사고, 서진씨는 아직도 상처가 있는지 통 어머니 얘길 하지 않아.”

유진은 이외에도 서진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고 그럴수록 그에 대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하지만 상혁이 유진의 곁을 갑자기 떠난 그때처럼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해리성 둔주로 기억을 잃었다면 억지로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시간만 흐르던 중 도연이 유진을 따로 불러냈다.

“자, 청첩장. 결혼식 날 예쁘게 하고 와, 서진씨 친구들 중에 멋있는 사람 많거든.”

퇴근 후 유진을 데리고 작은 선술집에 간 도연은 유진에게 청첩장을 건넸다.

“축하해요, 언니.”

청첩장을 받아든 유진은 갑작스레 요동치는 심장의 통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슬픔을 감추며 억지스레 미소를 짓는데 선술집 문을 열고 서진이 들어왔다. 숨이 멎을 듯 점점 더 유진의 가슴이 옥죄었다. 순간 픽, 유진의 몸이 테이블 옆으로 쓰러지자 놀란 도연은 유진을 서진의 등에 들쳐 업힌 채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까무룩, 정신이 깬 유진은 서진의 등에서 전해오는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맞잖아, 오빠 맞잖아.’

훤칠한 키의 상혁에게 장난삼아 자주 업혔던 유진은 익숙한 듯 자신을 업고 달리는 서진에게서 분명하게 상혁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일 이후 유진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자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었지만 하루하루 결혼 날짜는 가까워졌다. 그러던 중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하던 유진은 한 가지 방법을 떠올렸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도연과 서진의 결혼식 며칠 전, 유진은 두 사람이 바닷가 근처 식당에서 가족 모임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족 모임이 진행되는 시간, 차를 렌트해 식당 근처로 간 유진은 모임이 끝나길 기다렸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멀리서 식당을 나오는 도연과 서진의 모습을 확인한 유진은 전속력으로 질주해 등대 끝으로 내달렸다.

 

검은 바다 위에 처참하게 구겨진 유진의 차가 떠올랐다. 비명과 아우성 속에 몰려든 사람들이 차량 안에서 유진을 꺼냈고 놀라서 지켜보던 도연은 뭍으로 올라온 유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곧 도착한 구급차에 유진이 실려 가자 도연과 서진 또한 그녀를 따라 병원으로 향했다.

“유진이는 왜 이런 선택을 한 걸까?”

눈물범벅이 된 도연이 중환자실 밖 대기실에서 서진에게 말했다.

“도연아, 이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슬픔에 빠진 도연의 눈앞에 서진이 핸드폰을 열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내 옛날 카톡 사진인데...아무래도...”

뜬금없이 사진을 내미는 서진을 도연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저번에 유진씨가 예전 남자친구 사진이라고 보여준 사진 말이야. 아무래도 내 사진 같아.”

제주도 바닷가 앞에서 찍은 오래된 서진의 사진은 유진이 보여줬던 흐릿하게 얼굴만 확대된 사진의 원본 사진이었다. 사진을 본 도연은 그제야 서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던 유진을 떠올렸고 그녀가 왜 등대를 향해 질주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일주일 후, 중환자실에서 유진이 눈을 떴을 때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내 유진 곁을 지키던 도연도 서진과의 결혼식 후 신혼여행을 떠난 후였고 사실을 전해들은 유진은 회복되지도 않은 몸을 일으켜 몰래 병원을 빠져나왔다.

 

다섯 달 후, 유진은 바닷가의 카페에 앉아있다. 혼자 커피를 마시며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직장 동료 혜미가 남자친구와 함께 카페에 들어섰다.

“어? 유진언니, 여기서 다 만나네요?”

혜미는 남자친구 지석과 함께 유진에게 다가왔다. 지석을 마주한 유진의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푸르르, 떨렸다. 유진의 넋 나간 듯한 행동에 혜미와 지석은 서로를 마주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상혁씨? 상혁씨 맞지?”

삼척의 바닷가 카페, 철썩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마주앉은 두 사람에게 유진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내밀었다. 멀리서 폭풍우을 품은 검은 구름이 삼척의 푸른 바다를 빠르게 뒤덮고 있다.

 

 

🔔이 작품은 유튜브 소리나는 책방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youtu.be/6TqX0OA1QYk

'미스테리 공포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속 부부의 비밀  (0) 2021.02.27
히치하이커, 사라진 여행자  (0) 2021.02.23
그림자 인간  (0) 2021.02.22
흉가  (0) 2021.02.20
이것 좀 밀어주시겠어요?  (0) 2021.02.20